담론 - 신영복
담론, 신영복, 돌베개, 2015(초판 7쇄)
강의록을 책으로 내면서 생각이 많습니다. '책'이 강의실을 떠나 저 혼자서 무슨 말을 하고 다닐지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책은 강의실보다 작고 강의실에는 늘 내가 서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하면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옳습니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결론입니다. 나는 20년의 수형 생활 동안 많은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그 만남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완고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책은 2~3년 전의 생각이고, 강의는 어제 저녁의 생각이라고 합니다.
계몽주의는 상상력을 봉쇄하는 노인 권력입니다. 생생불식,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온고보다 창신이 여러분의 본령입니다. 그리고 강의라는 프레임도 허물어야 합니다. 학부 강의에서 가장 불편한 것이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강의라는 틀입니다. 문제 중심이어야 하고 정답이 있어야 합니다. 개념과 논리 중심의 선형적 지식은 지식이라기보다 지식의 파편입니다. 세상은 조각 모음이 아니고 또 줄 세울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강의는 여기저기 우연의 점들을 찍어 갈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담론들은 5년 후, 10년 후 고독한 밤길을 걷다가 문득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시는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어디로 가려고 할 때가 시가 실패하는 때이다."
사과를 쪼개면 그래도 쪼개진 각각의 조각이 여전히 사과입니다. 만약 사람이나 토끼를 쪼갠다고 하면 그 쪼개진 조각을 여전히 사람이나 토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추상력과 나란히 상상력을 키워야 합니다. 작은 것, 사소한 문제 속에 담겨 있는 엄청난 의미를 읽어 내는 것이 상상력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다만 작게 나타났을 뿐입니다. 빙산의 몸체를 볼 수 있는 상상력을 키워야 합니다. 세상에 사소한 것이란 없습니다. 다만 사소하게 나타났을 뿐입니다.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와의 대화가 기쁜 것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과 도덕성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어서는 인간관계에서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귀곡자는 언어를 좋은 그릇에 담아서 상대방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하는 것, 그것이 성誠이라고 했습니다.
'70%의 자리'가 득위의 비결입니다. "70%의 자리에 가라!" 자기 능력이 100이면 70의 역량을 요구하는 곳에 가는 게 득위입니다. 반대로 70의 능력자가 100의 역량을 요구하는 곳에 가면 실위가 됩니다. 그 경우 부족한 30을 함량 미달로 채우거나 권위로 채우거나 거짓으로 채울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맡은 소임도 실패합니다. ..
학생들로부터 70% 밖에 안 되더라도 100의 자리에 가면 그만한 능력이 생기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에게는 그것이 기회가 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을 몹시 고통스럽게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비유가 신랄합니다. "히말라야 높은 설산에 사는 토끼가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동상이 아니었습니다. 평지에 사는 코끼리보다 자기가 크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부려서 하는 일이 자기의 능력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과 자리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 내가 좋아하는 글을 소개합니다.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한다." 큰 것을 깨달은 사람은 작은 것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먼저 자신을 업신여긴 다음에라야 비로소 남들이 자기를 업신여길 수 있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고결한 자존심입니다.
기형도는 '소리의 뼈'가 '침묵'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열악한 노동 현실 때문에 노동에 대한 관념이 부정적입니다만 사실은 노동하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 더 정확하게 정의한다면 노동은 '생명의 존재 형식'입니다.
어느 불구자의 자기 성찰입니다. 불구자인 산모가 깜깜한 밤중에 혼자서 아기를 낳고 그 무거운 몸으로 급히 불을 켜서 자기가 낳은 아기를 비추어 본다는 이야기입니다.
탁은 발을 본뜬 것입니다. 발의 카피입니다. 현실보다는 현실의 카피가 훨씬 쉽고 우리에게 친숙합니다. 책 역시 현실의 카피입니다. 탁입니다. 내가 보기에 여러분도 발로 신어 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리포트를 제출하라고 하면 대다수가 인터넷이나 책을 찾습니다. 이것은 카피를 찾는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 Victor-Marie Hugo가 『레미제라블』에서 한 말입니다. "땅을 갈고 파헤치면 모든 땅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 씨앗의 싹을 틔우고 꽃 피우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우선 그 사람의 인생사를 알고 있는 경우에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가 살아온 삶의 역사적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다시 쓸 수 없듯이 그 사람의 생각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종적으로는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개인을 단위로 완성될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전쟁에서 이겼다는 것은 전쟁에 나간 아들이 죽지 않고 돌아온다는 걸 의미한다. 어머니가 돌아오는 아들을 언덕에서 기다리는 것만큼 전승의 의미를 표현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비좁은 잠자리에서 혼자 일어나려면 '무 뽑듯이' 조용히 몸을 뽑아야 합니다. 조용히 몸을 뽑아 찬 벽에 등 기대로 앉으면 몸서리치며 정신이 깨어납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옥을 다르게 정의합니다. '감옥은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는 착각을 주기 위한 정치적 공간'입니다. 역설적 진리입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해서 태평성세하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보이지 않는 감옥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옆 사람을 향하여 부당한 증오를 키우지 않기 위해서 그 증오를 만들어 내는 보이지 않는 구조를 드러내고 우리를 가두고 있는 보이지 않는 감옥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가 하는 공부의 목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겨울은 어지러운 생각을 정리하는 '철학'의 계절이었습니다. 기상 한 시간 전에 일어나 찬 벽 기대고 앉아서 열중했던 찬 벽 명상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명상은 현재의 공간을 벗어나는 정신적 탈옥입니다.
서도의 관계론은 서도의 미학이 '관계'를 중시한다는 뜻입니다. 우선 서도는 서양에는 없는 장르입니다. 서양에는 캘리그래피, 펜맨십이란 개념이 있지만 그것을 서도와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흑과 백의 조화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상당한 정도의 필력이면 까만 부분은 보지 않아도 됩니다. 하얀 부분이 얼마 남았나를 더 많이 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정은 잘 알지 못합니다. 반면에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세심한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불가피했던 수많은 이유들에 대해서 소상하게 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추상같이 엄격하고 자기에게는 춘풍처럼 관대합니다. '대인춘풍 지기추상'이란 금언은 바로 이와 같은 자기중심적 관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는 것이 패션입니다. 부단한 변화와 새로운 것에 대한 신화입니다.
물론 소비를 통하여 행복감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소비를 통하여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인간적 정체성은 소비보다는 생산을 통하여 형성됩니다.
나는 신문지 크기의 햇볕만으로도 세상에 태어난 것은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받지 못했을 선물입니다.
'독버섯'은 사람들의 '식탁의 논리'입니다. 버섯을 식용으로 하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버섯은 모름지기 '버섯의 이유'로 판단해야 합니다. '자기의 이유',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멀고 힘든 여정이라 하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를 줄이면 '자유'自由가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