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 테드 창
숨, 테드 창, 북하우스 퍼블리셔스, 2019(1판 2쇄)
“우연도 의도도 태피스트리의 앞뒤면에 불과합니다. 둘 중 하나를 마음에 들어할 수는 있지만, 한쪽이 진짜이고 반대쪽은 가짜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요.”
만약 우리의 인생이 알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등장인물인 동시에 관객이고,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를 살아감으로써 그것이 전해주는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다시 살 수 있다고 스스로를 기만할 생각은 없다. 나는 그 공기가 아니라, 그 공기가 일시적으로 취한 패턴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를 이루는 패턴과, 내가 살고 있는 전 세계를 이루는 패턴들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애나는 자기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노력한다. 동물과의 비 성적인 관계는 정상으로 보면서 왜 성적인 관계는 그럴 수가 없을까. 동물이 인간에헤 해줄 수 있는 한정된 동의는 동물을 애완용으로 기르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데, 왜 그들과 섹스를 하기에는 충분치 못한 것일까. 이번에도 애나는 개인적인 불쾌감에 근거하지 않은 반박 논리를 찾을 수가 없다. 불쾌감이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잭스를 키우면서 애나가 얻은 교훈이 있다면,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세계에서 이십 년 동안 살며 습득한 상식을 가르치고 싶다면, 그 일에 이십 년을 들여야 한다. 이에 상응하는 발견적 논리를 그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조합할 방도는 없다. 경험은 알고리즘적으로 압축할 수 없다.
우리는 인지적 사이보그가 될 것이다. 무언가를 잘못 기억한다는 행위 자체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지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존재다.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들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건들을 경험하더라도
우리가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특정 순간들을 선별하는 기준은 각자 다르며, 그것은 우리의 인격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우리들 각자는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는 세부 사항들을 인식하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기억하며, 그 결과 구축된 이야기들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한다.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글쓰기는 테크놀로지다. 따라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의 사고 과정에는 테크놀로지가 매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글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인지적 사이보그가
되며, 그 사실은 우리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과거에 대한 기록이 마땅히 불변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글을 쓰는 문화가 글에 대해 느끼는 외경심의 산물이다.
그리고 나는 디지털적 기억의 진짜 혜택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요점을 말하자면 이렇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옳았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과거의 여러 시점에서 틀린 적이 있고, 잔인했거나 위선 적으로 행동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그런 일들 대부분을 망각한다. 바꿔 말해, 우리는 스스로에 관해 거의 모른다.
에스퍼레이션aspiration이랴는 단어에 염원과 숨을 뱉는 행위 양쪽의 뜻이 모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말을 할 때, 우리는 폐의 숨을 이용해, 우리의 생각에 물리적인 형태를 부여한다. 우리가 내는 소리는 우리의 의도인 동시에 우리의 생명력이다.
과거는 이 세계에 여러 흔적을 남겨놓았고, 우리는 그것을 읽어내는 방법을 알기만 하면 됩니다.
자기 몸에 달린 배꼽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배에 배꼽이 없는 인간을 본다는 것은 훨씬 본능적이고 내밀하기까지 한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세상을 이해하는 게 더 쉬워지니까.”
굳이 고민하지 않고 쉽게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그 사람들이 쉽게 그럴 수 있는 것은 선하게 행동하려는 작은 선택을 예전에도 여러 번 했기 때문일 거예요. 내 경우는 다른 사람들에게 선하게 행동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건 예전에도 이기적으로 행동하려는 작은 선택을 여러 번 했기 때문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