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색환시행 _ 온다 리쿠
둔색환시행, 온다 리쿠, 시공사, 2024(초판 1쇄)
이것이 남편이라는 이름의 타인인가. 그러 식으로 마사하루를 객관적으로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여자들이 있고 얼굴 없는 사내들이 있고 그림자처럼 오가는 늙은이가 있고, 환하고 텅 빈 어둠의 밑바닥에서 그림자가 어른어른 흔들리고 있었다.
“프랑스 속담에 여행이란 조금 죽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대.”
요즘 흡연실은 이처럼 양심의 가책과 공범자 의식과 동족 혐오로 얼룩진 정신적으로 복잡한 장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주위에서 격리해 가두어놓은 집단이라는 것에 굴욕과 동시에 마조히스틱한 희열을 느낄 정도다. 계속 차별을 받다 보면 차별을 하는 쪽에 대해 차츰 선민의식이 생겨난다는 것을 아주 잠깐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실은 퍼레이드에서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금색 색종이,라고 했던가? 그 말은 이상하리만치 딱 들어맞았다. 온 사방에 팔랑팔랑 흩날리는 색종이, 그 속에 있으면 아름답게 빛을 뿜어내고 꿈 같은 고양감에 휩싸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땅바닥에 쌓이고 밟혀서 그저 싸구려 종잇조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날이 저물 때까지 허리를 굽혀 부지런히 청소해야 한다. 지겹도록 쓸어 모아 쓰레기봉투에 담을 무렵에는 허리도 아프고, 흙 묻은 꼬깃꼬깃한 종잇조각 때문에 무슨 고생인가 싶어 아주 넌더리가 난다.
“아, 그렇지, 재미있는 소리를 하더군. 영화를 보는 행위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영화를 상영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일세.”
아, 이렇게 얘기가 딴 데로 새는 것도 노인네 말투인데. 본론으로 곧장 안 가고 괜히 엉뚱한 데서 전봇대 둘레를 빙빙 돌게 된다니까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엄마를 그리워하는 이야기’가 존재하는 게 재미있지 않나… ‘아빠를 그리워하는 이야기’는 별로 없는데 말이야.
사실과 현실은 있어. 생활도 있고 감정도 있지. 가끔은 감동 같은 것도 조금은 있을지도 모르지.
한데 진실은 없어. 인생 속에는 진실이 없네.
분명히 말하겠네.
진실은 허구 속에만 있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허구 속에는 진실에 닿을 수 있는 순간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