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과 예술가, 알렉상드르 라크루아, 을유문화사, 2026(초판 1쇄)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시대는 대략 19세기 중엽에 시작된다. 1858년. 보들레르는 <인공 낙원Les Paradis artificiels>의 초판을 출간한다. 같은 해에, 특히 노동자들 사이에서 널리 번지고 있는 현상을 일컫기 위해 ‘알코올 중독’이라는 말이 사전에 실린다.

 

 

 그가 작가 수첩에 쓴 글을 보면, 불쾌감을 주려는 의도는 그가 계획한 일이었던 것 같다. “보편적 불쾌감과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게 될 때 나는 고독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

 댄디즘이란 생산성을 높이려고 공장들을 건설하던 시대에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 귀족처럼 행동하며 자신의 초연함과 자유분방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술에 취한 몸은 돌출 행동을 하고 실수를 범하는데, 그렇다고 묶어둘 수는 없다. 술에 취한 몸은 사회적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절망적이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과거를 없앨 수 없듯이, 상흔도 결코 없앨 수 없다. 알코올 중독자 모임의 참석자들이 매번 모임을 시작할 때 자기 이름 앞에 알코올 중독자라는 말을 붙이는 건 우연이 아니다(몇 년째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을지라도). 한때 중독에 빠졌던 사람들은 자신이 정확히 어떤 그룹에 속하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 가운데 정말 가슴 두근거리는 건 단 두 가지뿐이다. 다른 인간과 성관계를 갖는 것, 혹은 그를 죽이는 것이다.

 

 

 폭력적인 죽음에 대해 많은 사람이 느끼는 관심을 증명하기 위해 여태껏 제작된 모든 영화에서 발사된 총알의 수를 세어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부코스키의 말에 따르면,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조롱과 우울 섞인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아야 하고, 진지한 감정이나 진지한 말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자기 삶을 염탐하는 스파이가 되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목구멍과 음부를 잠깐이나마 충족시키는 것보다 나은 그 어떤 것도 얻어 낼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먼저 눈부터 이상이 생긴단 말이지. 포크가 두 개로 보이지 않고 (포크 하나를 들어 올린다) 하나로만 보인다 이거야. 세상을 나는 절반밖에 보지 못하는 셈이지.”

 푼틸라는 분열 증세에 길들어 있다. 금주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그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현실이 갑자기 부피를 잃고 납작해지기 때문이다. 그림자와 가능성들로 풍성했던 현실이 더는 하나의 단순한 명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구속이 되어 버린다.

 

 

 알코올 중독자에게는 현재를 넘어서는 것이면 무엇이든 경직되고 멀게만 보인다. 미래는 텅 비고, 과거는 굳었다. 그러니 알코올 중독자의 동사 변화는 두 가지 시제로밖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재, 그리고 술을 마시기 이전의 자신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과거가 그것이다.

 

 

 그의 기호는 ‘전기’처럼 찌릿찌릿한 화이트 와인에서 그가 ‘비프 스테이크’에 비유한 레드 와인으로 옮겨갔다.

 

 

 기 드보르는 옛날식의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는 만성 알코올 중독 상태에서 ‘장엄하고 무서운 평화를 발견했고,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맛볼’ 수 있었다.

 

 

 

 

 

 

 

 

마케팅이다, 세스 고딘, 쌤앤파커스, 2026(초판 60쇄)

 

 

 

 이제 마케팅은 연못이나 숲보다 더 많이 삶의 풍경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마케팅에 대한 거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로 통한다. 바로 “누구를 도울 것인가?”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열쇠를 만든 다음 그 열쇠로 열 수 있는 자물쇠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마케터는 소비자를 이용하여 회사의 문제를 해결해서는 안 된다. 마케팅을 이용하여 소비자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2017년, 미국인들은 개 사료를 사는 데 240억 달러가 넘는 돈을 썼다. 개 사료의 평균 가격은 급등했다. 재료도 고구마, 사슴고기, 들소고기 등 고급스러워졌다.

 하지만 나는 아직 개 사료를 직접 사는 개는 보지 못했다.

 

 

 음모론자들은 대다수 사람들이 무시하는 음모론을 신봉함으로써 자신이 바라는 감정, 즉 자신이 특이한 사람이자 용감하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며 아웃사이더라고 느낀다.

 

 

 팩스기는 놀라웠다. 그것은 기발한 광고 캠페인 때문이 아니라 사용자들이 이야기를 해서 확산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상대도 팩스기를 가지고 있으면 더 좋기 때문이다.

 

 

 의견을 물어보는 것은 용감하면서도 멍청하다. 어떻게 보면 자신이 틀렸음을 증명해달라고 요청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훌륭한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아요.”라는 말을 하게 만드는 꼴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조언을 구하면 어떨까?

 “내가 좋아하고, 당신도 좋아할만한 것을 만들었어요. 어떻습니까? 당신의 세계관과 더 잘 맞도록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해줄 말이 있나요?”

 

 

 유전적인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귀뚜라미와 소고기에 대해 어떤 정해진 감정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먹고 저것은 먹지 말아야 할 명확하고 합리적 이유가 없다면, 왜 우리는 소고기는 좋아하면서 귀뚜라미는 꺼리는 것일까(아니면 그 반대일까?)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렇기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들의 경우 기억나는 가장 오래된 순간부터 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까지 하나의 질문이 행동을 좌우한다.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할까?”이다.

 

 

 우리는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우리와 비슷한 부류가 인식하는 바를 토대로 결정을 내린다. 그래서 700달러짜리 유모차를 산다. 똑똑하기 (사실은 멍청하기) 때문이다.

 

 

 삶에 큰 변화가 생길 때는 새로운 패턴이 형성된다. 얼마 전에 아이가 생긴 아버지나 약혼한 여성, 이사한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마케팅이 수지맞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들에게는 아직 부합할 패턴이 없다. 모든 것이 과거의 패턴과 단절된다.

 

 

 브랜드는 고객의 기대에 대한 약칭이다.

 

 

 당신은 많은 사람을 섬길 것이다. 그러나 이익은 소수에게서만 얻을 것이다.

 

 

 게릴라 마케팅에 관한 경영서를 많이 쓴 제이 레빈슨은 이런 유명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신에게 지겹다고 해서 광고를 바꾸지 마라. 직원들에게 지겹다고 해서 광고를 바꾸지 마라. 친구들에게 지겹다고 해서 광고를 바꾸지 마라. 회계사가 지겹다고 할 때 바꿔라.”

 이 말은 광고를 넘어서 다른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다. 당신이 하는 모든 스토리텔링은 반복이 필요하다.

 

 

 당신은 “이것을 선택하면 이사회 / 투자자 / 상사에게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는 대답을 마케팅해야 한다.

 

 

 

 

 

 

 

아뇨, 아무것도, 최제훈, 한겨레엔, 2025(초판 1쇄)

 

 

 

 깊은 밤에 잠을 깨면 다시 잠들기가 쉽지 않다. 깊은 밤이 자꾸만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깊은 밤과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건 괜찮지만, 무심코 속내를 내비치거나 고민을 털어놓는 건 조심해야 한다. 깊은 밤은 무엇 하나 허투루 듣는 법이 없다. 숨결 같은 작은 속삭임도, 속삭임마저 생략된 여린 한숨도, 깊은 밤의 깊고 캄캄한 동굴로 들어가면 거센 돌개바람으로 되울려 나온다.

 

 

 제 속을 오롯이 내보이며 공감을 표하지만, 깊은 밤이 품은 건 깊고 캄캄한 동굴밖에 없다. 발을 들이면 누구나 자기 목소리에 둘러싸여 길을 잃고야 마는, 자신의 빈 마음이 무엇을 헤집었는지 알지 못한 채, 깊은 밤은 다시 혼자가 된다. 친구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깊어져간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그냥 썼다.

 청탁 없이 마감 없이 분량 제한 없이, 그냥 쓰고 싶어서.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작업이 평소보다 조금이라도 더 즐거웠다면 내가 아직 아마추어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탓일 것이다.

 

 

 프로페셔널리즘이 삶을 풍족하게 만들어준다면 아마추어리즘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정식 씨는 서버를 불러 아메리카노를 두 잔 주문했다. 가루가 떨어질 것 같은 부석한 피부와 퀭한 눈에 매달린 다크서클, 깊이 팬 팔자주름. 그의 얼굴은 석 달 전 장례식장에서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아니 주인이 떠난 폐가처럼 더욱 쇠락해진 모습이었다.

 

 

 “당신이 테니스를 쳐야 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아름다움도 이 세상에 꼭 존재할 이유는 업는 것이지요. 하지만 뭐, 있으면 좋지 않습니까.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우아하고 아름다운 폼으로 상대편 코트에 공을 보내는 선수가 한 명쯤은 말입니다. 당신에게 테니스는 어떤지 몰라도, 테니스에게 당신은 분명 의미있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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