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문학동네, 2024(1판 6쇄)

 

 

 

 

 채운이 기억하기로 아버지는 구태의연한 말을 의기양양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삶에서 진부한 교훈을 추출해 남들에게 설파하기를 즐기는 사람. 그러나 본인은 그 교훈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남들 다 보는 데서 자신에게 실컷 욕을 퍼부은 뒤 “아, 미안. 내가 거짓말을 잘 못해서”라고 으스댈 것 같았다. 아버지는 자신이 빈말 못하고 솔직하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실은 그게 어떤 무능을 뜻하는지 잘 알지 못하면서.

 

 

 

 ‘피는 한 사람에 대해 혹은 그 가계에 대해 무얼 얼마만큼 말해주나?’

 

 

 

 지우가 이해하기로 지우개는 뭔가를 없앨 뿐 아니라 ‘있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누구든 신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는 신의 얼굴을 조금 지워야 했다. 

 

 

 

 ‘가난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머리통이 깨지는 것. 작은 사건이 큰 재난이 되는 것. 복구가 잘 안 되는 것……’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의 기원 _ 정유정  (0) 2025.06.02
28 _ 정유정  (0) 2025.05.22
환상의 빛 - 미야모토 테루  (0) 2025.05.22
아이언 플레임 2 _ 레베카 야로스  (0) 2025.05.07
아이언 플레임 1 _ 레베카 야로스  (0) 2025.05.07

28, 정유정, 은행나무, 2024(1판 50쇄)

 

 

 

 

 거실 쪽에서 이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형은 현관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쿠키를 내려다봤다. 조용히 일기라도 쓰는 듯한 얼굴이었다. 

 

 

 

 속눈썹까지 얼음이 엉겨 붙었다. 바람은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우고 뱃가죽을 긁어 팠다.

 

 

 

 침 때문에 살이 튼 딸의 볼에다 ‘부비부비’를 하지 못한 게 벌써 며칠째였다. 아내의 표현을 빌자면, 들개처럼 쏘다니고 싶은 ‘개 병’이 도져서.

 

 

 

 저 침대에 누우면 꿈도 백색으로 꿀 것 같았다.

 

 

 

 박은희와 한유빈을 찾아달라고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었다. 먼 지평선으로 물러가는 소나기 소리처럼.

 

 

 

 “안녕하시오.”

 네 눈엔 내가 안녕해 보이냐. 동해는 가위로 남자의 눈을 찍어버리려다 그만두었다. 쓸데없는 짓으로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그의 어깨를 스쳐 갔다. 탈출하려는 바보일까, 세상이 어찌 되든 평상시 하던 짓을 하는 머저리일까. 동해의 눈엔 후자로 보였다. 평상시 하던 짓을 하는 걸로 평상이 지켜지고 있다고 믿는 부류.

 

 

 

 그가 아는 스타는 마야처럼 ‘조용하게 오래도록 바라보는 개’였다. 스타, 하고 부르면 걸어가다 멈춰 서서 귀를 내리고 돌아보던 개였다. 스타, 하고 한 번 더 불러야, 바라보기를 멈추고 걸어와 자신의 겨드랑이 밑으로 수줍게 얼굴을 밀어 넣는 개였다. 그토록 조심스럽게 애정을 표현하던 개가 목이 반쯤 잘린 채 눈밭에 드러누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30리 길을 걸어 읍내 학교에 다니던 시절, 윤주의 삶을 추동하는 엔진은 두 개의 손이었다. 산골 아이라면 마땅히 순박해야 한다고 믿는 담임선생과 닭 모가지나 비틀어야 할 촌닭집 딸이 전교 1등을 해선 안 된다고 믿는 반 아이들과 붙임성도 없고, 귀염성도 없고, 사람을 성나게 하는 재주만 갈고닦은 저 계집애를 어디에다 써먹느냐고 혀를 차는 어머니와 자신의 인생을 영원히 짓누를 것만 같은 지리산의 어둠을 향해 따귀를 올려붙이는 그녀 자신의 손, 저녁나절,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말없이 가방을 들어주던 늙은 아버지의 닭 잡는 손.

 

 

 

 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성이었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성. 그가 쉬차를 버리지 않았다면 쉬차가 그를 버렸을 터였다. 그것이 삶이 가진 폭력성이자 슬픔이었다. 자신을, 타인을, 다른 생명체를 사랑하고 연민하는 건 그 서글픈 본성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로 보듬으면 덜 쓸쓸할 것 같아서. 보듬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를 버리지도 해치지도 않으리란 자기기만이 가능하니까.

 

 

 

 

 

 

 

 

 

 

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바다출판사, 2023(초판 9쇄)

 

 

 

 

 이렇게 이층 창가에 앉아 따스한 봄볕을 쬐면서 잔잔한 바다와 일하러 나가는 그 사람 차가 꼬불꼬불 구부러진 해안도로를 콩알만 하게 멀어져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몸이 다시 꽃봉오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삐걱삐걱 오그라드는 것 같습니다.

 

 

 초경이 무서웠던 게 아닙니다. 저는 그때 가난이라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원망했던 것입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는 국도로 사라진 할머니의 조그마한 뒷모습이나 막벌이꾼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던 어머니의 모습이, 한낮인데도 전구를 켜지 않으면 안 되는 축축한 방 가득히 되살아났습니다. 

 

 

 오늘 역에서 그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문 밖에서 희미한 술렁거림이 일었다. 여관의 안뜰에 있는 잎을 떨어뜨리는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는데 교토의 약간 후미진 곳에서는 그와 비슷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술렁거림이 귓전을 때린다…. 아무도 자지 않는데도 방의 어딘가에서 잠자는 숨소리 비슷한 게 들려올 때도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