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은 새가 모이는 곳에 있다
그러나 삶이 꽉 끼는 셔츠와 같다는 것은 오직 시간과 공간의 감옥에서 벗어나야만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죽은 그 바보가 그리게 한 나무는 가련하고 외로운 나무였다. 뒤편으로는 그 나무를 더욱 외로워 보이게 하는, 시라즈의 가장 오래된 거장들의 화풍을 연상시키는 꽤 높이 그려진 지평선이 있었다. 그런데 지평선을 너무 높이 그려서 생긴 여백에는 다른 그 무엇도 없었다. 이처럼 나무를 나무이기 때문에 그리려는 베네치아 화가들의 욕구와, 세상을 한눈에 내려다보려는 페르시아 거장들의 욕구가 서로 뒤섞여, 베네치아인의 그림도 페르시아인의 그림도 아닌 비참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이 끝나는 곳에 있는 나무는 이렇게 생겼겠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모든 살인자들은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무신론자들이 아니라 광신도들 사이에서 나온다.
나는 그가 ‘미천한 화가 무스타파’라고 서명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는 개성이란 것이 있는가, 있다면 서명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하나 아니면 옛 대가들처럼 감추어야 하나, 겸손은 서명을 필요로 하는가 하지 않는가 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미소를 지으며 승리감에 휩싸여 서명을 한다.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과 소재를 가지고 스스로를 조롱할 정도로 자신감에 넘친다.
“화가가 그린 소재와 화가 자신이 비슷할 거라는 생각은 나를 포함한 장인들을 전혀 모르는 자들의 생각이네. 우리를 드러내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리도록 요구한 소재가 아닐세. 그리고 사실 그들은 늘 같은 것을 원하지. 화가의 개성은 소재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그림에 반영된 화가의 숨겨진 감수성을 통해서 드러나네. ”
화가는 종이 앞에서는 항상 혼자야.
멋진 말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바로 그 말이 된다.
멋진 말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멋진 말 그림을 그렸던 위대한 옛 대가가 된다.
많은 사람들은 말을 그림으로써 훌륭한 세밀화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훌륭한 세밀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멋진 말을 그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술탄과 그의 주위에 있는 바보들에게 내가 가장 훌륭한 세밀화가라는 것을 믿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멋진 말 그림을 그릴 때에만 내 자신이 될 수 있다.
엘리프(알라). 그림은 정신이 보는 것을 눈의 즐거움을 위해 재현하는 것이다.
람(자비). 눈이 세상에서 보는 것은 정신이 허락하는 만큼 그림에 반영된다.
밈(영광). 따라서 아름다움이란 정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눈을 통해 세상에서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나’를 처음 말한 자는 악마다. ‘스타일’이 있는 것은 악마다.
인간이 그 그림자까지 낱낱이 그려져야 할 정도로 중요한 피조물입니까? 어느 골목길에 있는 집들이 인간의 눈이 가진 미천한 지각 능력 탓에 갈수록 작아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면 세상의 중심에 신이 아니라 인간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 아닙니까?
내게 마음의 평안과 균형(걷는 균형 조차)을 준 건 뜻밖에도 손잡이가 상아로 된 이 검이었다. 책은 우리의 슬픔에 스스로 위안이라고 착각하는 깊이를 더해 줄 뿐이다.
얼굴을 드러낸 여자를 보고, 그녀와 이야기하고, 그녀의 인간적인 면을 보는 것은 우리 남자들의 욕정과 정신적 고통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우리 종교가 명령하듯 여자들, 특히 아름다운 여자들은 결혼 전까지 전혀 보지 않는 게 좋습니다.
‘행복해지는 방법을 모르는 자의 물건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행이나 악마와 친한 것이 그림에는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슬프게 느꼈다.
“어떻게 행복해지는지 알고 있어도 일부러 행복해지지 않을 수도 있지.”
카라가 말했다.
그 슬픈 시선에는 모든 도제들이 아는, 오직 한 가지 의미가 있다. 즉 환상을 꿈꾸지 않으면 시간은 결코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시인들은 남자의 물건을 ‘갈대로 만든 연필’이라고 했을까요?
복수가 사람의 마음속에 편안함과 정의감을 가져다 주는 것을 느꼈습니다.
몇 세기 동안 페르시아 시인들은, 남자의 페니스를 갈대로 만든 연필에 비유한 것처럼 우리 여자들의 입을 왜 물감 병에 비유했는지. 그리고 수없이 반복되며 실제가 잊혀진 이 비유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를(입의 조그마함? 물감 병의 신비스러운 고요? 신이 화가라는 것?) 전적으로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사랑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계속 머리를 짜내는 저 같은 사람의 논리가 아니라, 비논리를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그 무엇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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