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 9일
생각. 수치심은 본성이 아니므로
스스로에게 한 가지만 물어본다. "수치심"이란 본성인가.
수치심, 창피함을 안느끼는 사람이 있다면(병자나 세뇌자를 제외하고) 나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지, 무감각하거나 마모된 감정의 소유자, 자신에게 수치심이 없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을 말함이 아니다.
수치심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본성도 아닌 것을 확인, 관찰된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다는 것은, 다시말하면, 누군가, 혹은 어느 집단에 의해 그렇게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수치심을 느끼는 욕구를 누구는 지니고, 누구는 지니지 않는다면 이에 대해 그리 심각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구는 rock을 좋아할 수 있고, 누구는 pop을, 누구는 jazz를, 누구는 심지어 드라마를 좋아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그리 불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수치심은, 여태까지 내가 접촉한 사람 누구나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는 "수치심이 없는 인간은 없다"라는 말까지 허용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성장기 이론을 굳이 갖다붙이지 않더라도, 엄마와의 관계형성 이전의 '유아인간'에게 수치심은 관찰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늑대 무리 속에서 키워진 늑대인간은 인간이지만 수치심이 없다. 이것은 곧 수치심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듯 타고나지도 않은, 수치심을 대략 99.999999.....%의 인간이 갖고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의뭉스럽고 두려운 일인가. 이것이야말로 삶속의 매트릭스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인간의 기나긴 진화과정을 통해, 인간의 수치심 획득은 양심 내지는 죄책감과 연동되는 필요불가의 가치관(혹은 반응양상)으로 자라잡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치더라도, 오늘날의 어머니, 가족, 어른들은 태어난지 1시간 된 아이를 앞에 두고서, 앞으로 이 아이가 살아가는데에 있어서 "수치심"은 과연 오늘날에도 필요한가에 대한 충분한 숙고를 갖는가에 대해서는 상당수가 "아무생각 없음"으로 대처한다.
아무런 생각없이 애착관계를 형성하면서 아이의 수치심(곧 미래 인류의 수치심) 채득정도를 운에 맞겨버린다. 그리고서 "그것은 자연스런 부모, 가족, 어른으로서의 행동"이라고 아무생각 없음의 이유를 제시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수치심이 필요불가의 것이고, 인간사회에서 수치심 없는 아이를 키우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수치심을 느끼는 정도의 차이는 얼마든지 다르게 할 수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현시대와 미래시대의 사회에서 체감되는 수치심의 정도 또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30년 전에 길거리에서 키스하는 연인이 느낄 수치심과 지금 길거리에서 키스하는 연인이 느낄 수치심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치심은 결코 본능이 아니고, 자신이 타인에게, 자신이 스스로에게 변화를 줄 수 있는, 단지 가치관, 반응양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어떠한 검토 없이 마치 본능인 듯이, 과체중은 창피한 것, 범죄자는 창피한 것, 성도착 행위가 들키면 창피한 것, 식탐은 창피한 것, 무식은 창피한 것, 남들 앞에서 발표 망치는 것은 창피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수치심"이라는 감정은 인간을 설명해내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본성들과 달리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이른바 '제 2의 본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본래 본성의 인과야 창조자까지, 인간 바깥까지 가늠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사고가 될 것이다.(오늘날의 종교는 이에 대해 거의 포기한 모습으로 보인다. 그래도 과거의 종교보다야 낫지만.)
그러나 '제 2의 본성'은 가시될 수 있는 과거의 인류, 지금의 인류들이 만들고 진행중인 것이 아닌가. 오늘 당신은 창피한 일이 있었는가. 그것은 왜 창피한가. 적절한 정도의 수치심이었다고 생각하는가. 원해서 창피해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 수치심은 기쁘거나 자극적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불쾌한 것이 주는 이면의 쾌락인가. 아니면 자포자기인가. 내가 길을 가다가 똥을 밟고 넘어져서 옷과 손에 찐득하게 똥이 묻고, 그것을 주변인들이 보고서 웃거나, 안쓰러워 할 때, 느껴지는 수치의 감정, 이것은 인정할 만한, 적당한, 그런 정도의 것인가. 이미 불쾌해질 데로 불쾌해진 마당에, 수치심마저 "저도 모르게" 느끼게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이나 싯다르타를 존경하고, 이상적인 인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길을 가다가 똥을 밟고 넘어져서 옷과 손에 똥이 묻었을 때, 과연 당신과 동일한 수치심을 동일하게 느낄 것인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신이 늘 습관적으로 중얼거리는 "어떡해, 창피해."따위와 감정은 "어떡하지 않아도 되고, 창피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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