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나는 말이다, 꽃다발이 싫다.





나는 말이다. 꽃다발이 싫다. 이런 말 하면 꽃집 아줌마 아저씨 할아버지 할머니 아가씨가 싫어하겠지만 그래도 싫다. 받는 것도 주는 것도, 남들이 그러는 것도 싫다. 왜냐하면 그건 되게 잔인하니까 그렇다.

예전 내 여자친구의 가장 친한 친구가 춘천을 놀러 온 적이 있다. 내 여자친구의 가장 친한 친구는 오랜만에 보는 친구가 너무 반가워서 작은 케익과 꽃다발을 사서 선물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까페에 가서 "고마워, 꽃다발 정말 이쁘다." "응, 오늘 후레지아가 참 이쁜 게 있더라고."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글을 하나 썼는데, 내 여자친구와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가 꽃다발의 시체를 사이에 두고서 어찌나 아름답다고 떠들어대는 것이 그로테스크하게 보였다고 고백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꽃다발의 존재란 꽃의 가지를 가위로 절단하는 짓을 수반한다. 그러니까 꽃다발은 아플 것이다. 그리고 허리가 잘린 그 순간부터 서서히 말라가면서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서서히 죽어가는 꽃의 서서히 죽어가는 고통을 바라보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집에 들어온 꽃다발은 꽃병에 담겨 시름시름 몇 일 더 살거나, 벽에 걸려 미라가 된다.

나는 꽃다발이 화분보다 비싼 이유가 그 꽃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러니까 희소성의 원칙으로, 이 꽃다발은 보다 짧은 시간 동안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화분보다 비싸다는 것이다. 또한 꽃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친하건 친하지 않건 동족이건 근친이건 마구 섞어서 허리를 졸라맬 수 있기 때문에 비싸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미적 수준이 매우 성숙하여 죽음의 미학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허리가 잘려 수액이 주륵, 피처럼 쏟아지고, 그 뒤에 서서히 말라붙는 환부를 비닐로 감춘 뒤에, 죽어가는 꽃의 표정과 얼굴을 말똥말똥 쳐다보며 냄새까지 즐기는 이 최고 수준의 죽음의 미학에는 물론 비싼 값을 쳐주어야 하겠지.

내가 화가였다면 허리를 싹둑 자른 남녀의 벌거벗은 시체를 비닐과 끈을 이용해서 한 다발로 묶고 그들의 표정과 향기를 묘사하여 소더비 경매에 비싼 값에 팔려 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생각을 말로 하지는 않고, 조용히 내 홈페이지에 글로 옮겼다. 그런데 내 예전 여자친구가 이 글을 읽었고 화를 냈고 얼마가 지나서 나를 떠났다. 누군가는 해야 할 말이었다고 생각했고, <꽃다발 싫지 뭐야 연대>를 만들려 하였다가 귀찮아져서 그만 두었다. 나는 지금도 어떤 무대거나, 시상식이거나 꽃다발을 받게 되면 전철이나 버스에 두고 내린다. 가만히 앉아서 무릎 사이에 거창한 약 50여 개의 죽어가는 꽃송이들을 두고 있으면, 피에타 상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몸이 딱딱해진다. 예수를 죽인 것이 누구냐, 물으면 그것은 당연히 인간이지만,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꽃들을 죽인 것이 누구냐고 물으면 그건 또 왜 당연히 인간이 되고 말까.

동네마다 조그만 화원이 만들어지고 입장료를 내고 언제라도 감상 할 수 있게 될 수는 없을까나. 나는 말이다. 꽃다발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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