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거, 마셜 골드스미스, 마크 라이터, 다산북스, 2016(초판 1쇄)
하지만 명심하라. ‘간단하다’와 ‘쉽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비록 어떤 특정한 행동을 변화시킴으로써 얻어지는 개인적, 사회적 이익이 명확할지라도, 우리는 그 변화를 피해갈 변명거리를 만들어내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문제 해결을 돕고자 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쪽이 훨씬 쉽고, 심지어 더 재미있기까지 하다.
목표를 달성할 계획을 세울 때 우리는 내부의 에너지가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고 변화의 과정 동안 열정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자제력이란 소모되는 자원이란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나는 이런 현상을 성공한 CEO들 모두에게서 발견했다. 꿈에 그리던 CEO가 되었다는 기쁨이 첫 이사회 회의에 참석하는 순간 증발해버렸다는 점을 그들 모두 인정했다. CEO가 돼야 한다는 옛 문제가 CEO직을 유지해야 한다는
새로운 문제로 대체된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평가하는 데 있어 놀라우리만치 부정확하다. 내가 8만 명 이상의 전문가들에게 스스로의 성과를 평가해달라고 요청하자 70퍼센트는 스스로가 동료 그룹에서 상위 10퍼센트 이내에 든다고 응답했고, 82퍼센트는
상위 25퍼센트 이내라고 믿고 있었으며, 98.5퍼센트가 자신을 적어도 중간 이상이라고 평했다.
트리거란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모든 자극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좋은 친구, 파트너, 사원, 운동선수, 부모, 자식이 되겠다는 계획을 세울 때 우리 내부에는 두 가지의 인격이 존재한다. 자신을 바꾸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쪽이 리더. 계획가. 관리자이며, 그 계획을 실행하려는 쪽은
부하. 실행가. 직원이다… 실상 우리는 매일을 둘로 나뉜 인격으로 시작한다. 한쪽은 리더고, 다른 쪽은 부하인 상태다. 그리고 매일의 일정이 진행되는 동안 이 둘의 격차는 점점 더 커진다…
… 계획이란 멋진 것이다. 그 순간, 당신은 리더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같은 날 후반이 되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당신은 다른 역할을 하고 있다. 아침에 세운 리더의 계획을 수행해야 하는 부하가 되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일상 대부분이 사소한 순간들로 가득 차 있어서, 그 상황마다 어떤 의미부여를 하지는 않기 때문에 환경이나 우리의 행동에 대해 미리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이렇게 언뜻 환경이 잔잔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역설적으로 절대 방심해서는 안되는 때다. 우리가 환경을 예상하지 않을 때,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나 동료에게 별 생각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던진 말이 제3차 세계대전 급의 말다툼으로
번지거나 돌이킬 수 없이 큰 상처를 남겼던 경험이 있다면, 아마 내 말이 무슨 소린지 이해할 것이다.)
골퍼들은 지루해 보이는 경기야말로 훌륭한 경기라고 생각한다.
“은퇴하면 무슨 일을 할 생각이세요?”
“모르겠어요.”
“만약 당신 회사가 6개월 내에 완전히 변신해 고객과 정체성까지 바뀔 거란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그에 대비한 계획을 세울 겁니까?”
“물론이죠. 그러지 않는다면 무책임한 일이겠죠.”
“뭐가 더 중요하죠? 당신 회사와 당신 인생 중에서 말입니다.”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는 순간, 기대를 뛰어넘을 정도로 행복하거나 기쁜 것도 아닌 그저 ‘만족’하는 순간, 우리는 타성에 젖는다. 항상 해왔던 대로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직속상사가 우리 제안을 거절했을 때, 우리는 동료나 부하직원들에게 그 상사가 얼마나 보는 눈이 없는지 험담을 늘어놓는다.
창조, 보존, 제거에서 좋지 않은 면을 다 합친 것보다 수용하지 않아 나타나는 결과가 더 나쁜 행동의 트리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안하다는 사과가 마법의 행동 중 하나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마법의 행동이다…낙관주의(마음속 느낌뿐 아니라 밖으로 나타내는 것도 포함) 역시 마법의 행동이다. 우리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에게
끌리게 되어 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이끌어주길 바란다. 그의 성공을 돕기 위해서라면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당신은 명확한 목표가 있습니까?”와 “당신은 스스로 명확한 목표를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까?” 간의 차이를 구별하려다가, 내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로 이 수동과 능동이 맞서는 잘못을 해왔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한 SNS는 결심이 흔들리게 될 경우 미리 등록해둔 신용카드에서 후원금이 결제되도록 ‘계약’하게 한다. 우리가 지지하는 단체뿐 아니라 아예 평소 싫어하던 단체에 후원하게끔 해서 더 강한 효력을 발휘한다. ‘프리덤Freedom’이라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은 8시간 동안 인터넷 접속을 끊게 하고, ‘루즈 잇Lose It!’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은 얼마나 빨리 체중 감량을 원하는지에 맞춰 매일 섭취할 수 있는 칼로리의 상한선을 정해준다. 행동장치는 다양하고 현명한
동시에 어리석기도 하다.
말리의 식량 사정은 매우 열악했기 때문에 적십자는 심각한 정도에 따라 지원 대상을 분류해야 했다.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은 거의 살 가능성이 없었고 열여섯 살 이상은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냉정한 판단 하에서, 조달 가능한
식량들은 모두 두 살에서 열여섯 살 사이의 아이들에게 지급되었다.
적십자단원인 여성은 아이들의 팔을 만져보면서 누구에게 음식을 줄지 결정하는 중이다. 팔이 너무 두꺼우면 ‘충분히 굶주리지 않았다’고 판단해 음식을 주지 않는다. 반대로 너무 얇으면 ‘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역시 음식을
주지 않는다. 적당한 팔 두께를 가진 아이에게만 소량의 음식이 제공되었다.
공항에 있던 사람들이 비행기 운항이 지연된다는 안내방송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본 적이 있는가? 살면서 그렇게 부정적인 트리거를 보기도 쉽지 않다. 사람들은 동요한다. 죄 없는 항공사 직원들 앞에서 씩씩대며 성질을 참지 못하고
화를 낸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던 적이 있었는데, 성난 군중까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어쨌든 희생양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런 감정이 편치 않았는데, 말리의 굶주리는 아이들을 본 이후로 내게는 피해의식을
가질만한 권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키를 쥔 다른 사람이 있다고 믿을 때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은 단 한 가지, 그 멍청하고 부주의한 키잡이에게 불운의 원인을 돌리는 것이다. 그 비난 덕분에 우리는 분노하고, 소리치고, 탓하고, 피해자가 된다.
그런데 그 배가 비어 있음을 알게 되면 우리는 차라리 입을 다문다. 탓할 수 있는 희생양이 없으니 우리는 화를 낼 수도 없다. 이 불운이 그저 운명의 장난이라는 사실에 오히려 평안해진다. 이 넓은 강에서 사람도 안 탄 배에 부딪힌
어리석음에 실소조차 나오기도 한다.
참가자들에게 자기를 기분 상하게 만들고 화나거나 미치게 하는 한 사람을 떠올려보라고 주문한다.
“그 사람이 머릿속에 그려지나요?”
참가자들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네”
“오늘밤 그 사람이 당신 때문에 잠을 설칠까요?”
“전혀요”
“그럼 누가 벌 받고 있는 걸까요? 누가 벌을 주고 있는 거죠?”
이때 분명히 “둘 다 나 자신이네요”란 답이 나온다.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의 존재에 대해 화를 낸다는 건, 마치 의자가 의자라서 화를 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로 그 과정을 마친다. 의자는 어쩔 수 없이 의자일 뿐이고, 그건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당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좋아하거나 따르거나 존경할 필요 없이 그저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면 그만인 것이다.
“인생에서 우리의 임무는 긍정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지, 자신이 얼마나 현명하고 옳은지를 입증하는 일이 아니다.” 피터 드러커가 한 말이다.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현명하고 우월하고 옳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쪽을 선택하기 쉽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우리가 해결한 순 없다. 긍정적인 변화를 주지 못할 일에 시간을 쓰는 건 긍정적인 변화를 주는 일에 쓸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피터 드러커가 남긴 말 주에 내 인생을 바꾼 또 한마디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결정은 그 결정을 내릴 만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 내린 것이다. 이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왜 당신의 결심은 하루의 끝에 이르러 사라지고 마는가? 왜 뭔가 즐겁거나 유용한 일을 하는 대신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으 택하게 되는가? 그건 우리가 선천적으로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점점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심리학자인 로이 바우마이스터Roy F. Baumeister는 이런 현상을 ‘자아고갈ego depletion’이란 말로 설명한다. 바우마이스터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자아강도 ego strengh’라는 한정적인 자원이 있다. 이 자아강도는 유혹에
저항하고, 균형을 유지하고, 욕망을 억누르고, 생각과 표현을 조절하고, 타인의 규칙을 지키는 등 자기를 규제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 점차 약해져 고갈돼간다는 것이다.
바우마이스터와 다른 연구자들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자아고갈에 대해 연구했다. 처음에 그들은 주로 사람들을 초콜릿으로 유혹하는 것으로 연구했다. 연구자들은 초콜릿을 멀리하려는 노력이 이후 다른 유혹에 저항하는 힘을
감소시킨다는 점을 발견했다. 연료통 속의 휘발유처럼, 우리의 자기통제력도 유한하며 계속 쓰면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과의 끝에 이르면, 우리는 녹초가 되고 바고 같은 선택을 내리게 된다.
연구자들은 이를 ‘결정피로’라고 부르는데, 이 상태는 우리를 다음 두 가지 행동으로 이끈다. 부주의한 선택을 하게 되거나, 지금 현재에 굴복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결정피로는 우리가 결정을 미루는 이유도 된다. 지금 결정을
내리기에는 너무 메말라 있는 것이다.
생생한 실제 사례가 2011년 이스라엘의 가석방 위원회가 내린 1100건의 결정을 조사한 연구에서 드러났다. 연구자들은 이 위원회가 아침 일찍 내린 가석방 승인률은 70퍼센트에 달하는 반면, 오후에는 가석방 승인률이 10퍼센트로 떨어
진다는 점을 발견했다. 세 명의 이스라엘 위원들에게는 어떤 편견이나 악의도 없었고, 단지 시간 외에는 다른 의미 있는 패턴도 없었다. 아침 내내 죄수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고된 노동이 위원들을 지치게 만들어서, 오후가 되자 그들은
결정을 내리지 않는 쉬운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자원봉사를 약속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마음 내키면 언제나 도울 수 있고 또 불편한 상황이 오면 언제나 빠져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처음에 가졌던 훌륭한 의도가 결국 ‘이만하면 됐어’라는
결과로 후퇴한다. 진실성을 타협해버리는 것이다.
진실성이란 양단 간에 선택해야만 하는 종류의 미덕이다. ‘절반 임신’이란 게 없듯이, ‘절반 진실’이란 건 없으니까. 우리에게 지워진 의무가 무엇이든 꼭 해야 한다.
프로는 가장 높은 기준을 잡는다. 아마추어는 ‘이만하면 됐어’에 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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