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를 모두 지워버렸더니
어젯밤 TB가 말한 내용이 기억나질 않는다.
어젯밤
오래 전에 지워버린 번호로 누군가 문자를 보내왔다.
잘 지내냐는 안부 문자였다.
긴가 민가 하다가 이 사람이 누군지를 알았다.
그냥 알겠어서 신기했다.
반반이라고 대답했다.
가끔 소식도 좀 전해주고 그러라고 TB는 내게 말했다.
오래 편히 보는 친구 사이로 있어 달라고 했던 것 같다.
나는 나무가 아니다, 니기 원하는 곳에 있어줄 수는 없다,
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나의 정숙하며 초라한 자랑 하나를 공개하자면,
내가 좋아한 여자들은 대부분
남자에게건 여자에게건 인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게 친구가 많고 그렇게 만날 사람, 얘기할 사람도 많고
그런 이유로 정작 나를 만나는 동안에는 나를 만날 시간을 내주기 힘들었던 사람이
이제 와서 무슨
또 친구를 늘이겠다는 건지.
아마 또 한동안은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또 어제처럼
문득 생각이 나서… 라며 연락을 해올지도 모른다
전화번호를 지워버린 날 이후로
어제 내게 다시 연락한 그 사이에
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라고 말하려다가,
어쩐지 원망하는 투로 들릴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심퉁맞게 대한 날이나
그 다음날에는 기분이 좋다..
어이없게도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예전에 썼던 TB letter를 다시 읽어보았다.
구역질이 났다.
미적 감각을 지나칠 정도로 상실해버린 그런 사람이 눈에 띄었다.
튀어나오려는 그 사람을 다시 밀어 넣고 서둘러 TB letter를 닫았다.
지나칠 정도로 일정 감각을, 혹은 대부분의 감각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사랑에 빠진 이들이 아름다운지도 모르겠지만…
다리 하나를 저는 그래서 세 발로 절뚝거리며 뛰어가는
신나게 꼬리를 흔들며 눈웃음치는 개 한 마리가 떠오른다.
그 생각을 하니 새삼스레 다리가 저리다.
평생을 한결같이 편안하게 행복하게 바라보며 지낼 것 같던 사람들이
꼭 교통사고를 당하고는 한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세 번이나 샤워를 하고 누워서 이놈의 열대야, 하고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쉽게 쉽게 자기 편할 대로 생각해버리고는 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한 번은 어떤 친구가
연인이 되지 못한 친구 사이기 때문에 평생 볼 수 있으니 오히려 좋은 것 아니냐는 말을 한 적이 있다.(일종의 조언이었던 셈이다)
어떤 말을 하면 얘를 울릴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제대로 된 하루 하나면, 평생을 견딜 수 있다.
완벽한 행복의 순간 하나로 평생을 참을 수 있다.
그저 그런 감정으로 평생을 살아봐야 사는 것 같지 않을 것 같다.
그저 그런 관계로 평생을 기대만 하며 살아가게 하는 광기의 선물을 나는 거절한다.
이 말이 얼마만큼 먹혔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울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후로 얘도 소식이 끊겨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이 뚝뚝 끊어져 나간다.
그래도 나는 살아간다.
내게도 물론 소중한 친구들이 있다.
동성 친구들도 있고
TB가 내게 바란 관계, 드문 드문 연락하며 만나면 즐거워할 그런 여성 친구도 있다.
이 친구들이 귀한 친구들인 이유는
앞으로 몇 번을 언제 언제 어디서 만날 사람들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그들과 행복한 순간을 함께 겪었기 때문이다.
나조차 잃어버린 나의 모습을 이들이 간직해주기 때문이다.
조금 냉정하게 생각해보자면
TB가 요구한 그런 관계는 ‘꾸준히 나를 지켜봐 줘’ 라는 건 아닐까.
하하
하하하
소주 ‘처음처럼’의 라벨 상단에는 날아가는 오리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그것은 이 ‘처음처럼’의 본래 뜻이 ‘처음 나는 새처럼’ 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늘 밤엔 이걸 마셔볼 생각이다.
세 번쯤 샤워를 하고 핸드폰을 끄고 방바닥에 앉아서 등은 벽에 기대서.
처음 날았던 때를 좀 더 분명히 기억할 수 있다면,
좀 더 열심히 날았더라면,
ps.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읽었다,
거기서 스밀라가 이렇게 말한다
<내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떤 순간도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의 어떤 것도 단순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는 통로가 될 수는 없다. 마치 남겨놓고 가는 유일한 것인 양 매 걸음을 떼어야 한다.>
가끔씩 내가 너무 강해서 내가 견디기 힘들 때가 있다
하지만 내 방식이 그리 틀리지 않았다고 본다
39살의 스밀라도 이렇게 얘기하지 않는가
삶의 통로를 멋대로 그려놓고서
우리 저 끝까지 가는 동안 여기여기여기서 만나고
마지막에 이쯤에서 그 얘기들을 늘어놓자,
라는 건 환상이다
보고싶은 사람을
다음에 만나게 되는 것 따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실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