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요일에 대홍기획을 찾아가 두 이사님들과 선배님들에게 인사 드리고 대리님 한 분에게 점심을 얻어 먹고 친한 선배 한 명을 꼬득여 교보문고에 갔다. 그 선배의 여자친구가 이 선배에게 권해준 책들이 있었는데, <허삼관매혈기>,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등, 책 고르는 수준이 아주 탁월한 여자친구인 듯 싶었다. 그래서 그 여자친구가 선배에게 권해준 책들 중 하나를 내게 취업선물로 사달라고 했고,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셸 투르니에'의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이 선배에게, 나중에 선배 여자친구에게 책을 선물해 줄 일 생기거든 <모래여자>나 <소립자>를 선물해주라고 권해주었다. 직장인들 중에도(이 선배 여자친구의 직장은 건설회사인데 직종은 잘 모르겠다.) 좋은 책을 즐겨 읽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그나마 내가 직장인이 되어가는 것의 위로를 받는다.
* 이 단편집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은 <은방울꽃휴게소>였는데, 어느 부분이나 어느 표현이 마음에 든다기 보다, 작품 전체가 더하거나 뺄 것 없이, 온전한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고 그 세상이 아름다워서, 책을 읽다 말고 나도 모르게 '아름다워' 하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작품을 통째로 배껴서 통째로 옮겨 놓고 싶기도 한데, 그만큼 <은방울꽃휴게소>가 있는 이곳이 탐나고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 나는 어렸을 적에, 소위 전문가들이 정해놓은 좋은 책 목록을 보며, 도무지 선택의 기준을 모르겠다고, 이게 어째서 좋은 책들이냐고 한탄을 한 적이 많았다. 그것은 영화 전문가들이 매겨놓은 평점 높은 영화들을 보통의 관객들이 외면하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책을 계속 읽고 영화를 읽다 보면, 노벨 문학상이나 프랑스 콩쿠르 수상작들이, 적어도 믿을만한 책을 추천해준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이를테면 드라마에 빠져 살고, 스타벅스에 들락거리며 쇼핑에 관한 얘기를 즐기다가, 어쩌다 누군가의 생일 즈음이면 서점에 들르는 이들의 추천 서적과는 질적으로 차이를 지닌다.
그것은 분명, 수준 높은 소물리에나 와인 애호가들이 즐기는 영역의 즐거움을 제공해준다. 내가 그 책의 맛을 모르는 것은 그 책의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내가 그 맛을 즐길 정도의 준비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을, 계속해서 책을 읽어가면서 공감하게 된다. 이제 슬슬 <돈 키호테>를 읽을 준비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황야의 수탉>, 미셸 투르니에 소설집, 현대문학
저녁의 여신은 얼굴을 반쯤 베일로 가리고 튀피크의 침대로 몸을 구부리면서 “엄마 껴안고 뽀뽀하지 말아라, 머리 모양이 망가질라” 하고 말하곤 했다. 어느 날은 그가 애결했다. “그러면요, 엄마, 장갑이라도 제 곁에 놓아두세요.” 그것만은 엄마도 승낙했다. 조그만 침대에 염소가죽 장갑을 허물처럼 떨어뜨려 주었다. 검은 장갑은 마치 방금 벗겨낸 싱싱한 피부처럼 부들웠고 따뜻했다.
- <튀피크> 중
팔이 하나밖에 없는 것은 아내를 잃었기 때문일까? 장례식 날 왼팔을 잘라서 이제는 고인이 된 그 여자의 관 속에 넣은 것일까?
- <튀피크> 중
불운한 일을 당하면 주위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두 번째 불행을 겪으면 동정의 대상이 되지만, 불운이 수차례 계속되면 오히려 웃음을 주게 되고, 그때부터는 가련하고 비참한 음조를 내지르만 해도 대중의 유쾌한 환호성이 자신에게 파도처럼 밀려오게 된다는 것이다.
- <기쁨이 내게 머물게 하소서-성탄절 이야기> 중
그때 그녀는 자신의 연인을 나의 노포弩砲, 나의 기둥서방, 나의 마천루, 나의 인공 음경..., 등으로 불렀다. 뇌우가 지나가고 나면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를 두고 주위에 곁가지들이 붙어 있는 성기, 발들이 달린 음경일 뿐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를 나의 목걸이 보석, 나의 음란 벨트라고 부르면서, 긴 꼬리 원숭이가 새끼를 옆구리에 끼듯이 그를 허리에 달라붙게 한 상태로 집안일을 하겠다고 속삭였다.
- <붉은 난쟁이> 중
정적이 흘렀다. 구급차의 구슬픈 사이렌 소리가 아주 멀리에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천사가 지나가는군요.” 로비네가 여전히 빈정거리는 어조로 평했다.
- <트리스탄 복스> 중
멜라니는 순순히 따랐다. 더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신이 두려워하고 레몬으로 치료하려는 것은 괴혈병이 아니라 더 깊은 육체적이고 동시에 정신적인 병, 갑자기 세계로 몰려 들고 세계를 휩쓸어버리겠다고 위협하는 무미함과 단조로움의 파도라는 것을 자신이 알까말까 한데, 어떻게 남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멜라니는 권태로웠다. 일종의 현기증 같은 관념들로 권태를 참아내고 있었다.
- <소녀의 죽음> 중
오두막이 숲의 황량함에 휩싸였다. 어느 날 멜라니는 자신이 숙명적인 몸짓을 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하품을 했던 것이다.
- <소녀의 죽음> 중
우리 학회의 내 친구들과 나는 치명적이라고들 하는 버섯들이 가미된 저녁 식사를 즐기지. 요리할 줄만 알면 돼. 아마 겁내지 않고 먹을 줄도 알아야 할 거야. 두려움을 갖게 되면 인체가 더 약해지는 법이야.
- <소녀의 죽음> 중
웃음은 첫 단계에서 입술 괄약근의 갑작스러운 팽창, 그리고 산토리니 소근笑筋과 송곳니와 협근頰筋의 수축, 동시에 간간이 끊기는 날숨으로 특징 지워지지만, 둘째 단계에서는 근육의 수축이 모든 안면 신경에 영향을 주고 목 근육, 특히 활경근까지 퍼진다고 의사가 설명했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에서는 웃음이 신체의 모든 기관을 뒤흔들어 눈물을 흘리게 하고 소변을 지리게 하며 급격하고 불규칙한 고통스러운 요동으로 황경막을 수축시켜 장과 심장에 피해를 입힌다는 것이었다.
- <소녀의 죽음> 중
“집을 정결하게 꾸려나가고 싶어. 그렇다고 해서 결벽증이 있는 건 아냐. 물론 침대 밑의 양털을 용납하지 못하긴 해. 하지만 내 할머니는 하녀에게 머리핀으로 마룻바닥의 홈에 낀 먼지를 긁어내도록 시키기까지 했지. 난 그 정도는 아냐.”
- <황야의 수탉> 중
“뭐 해?” 그가 졸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보다시피 책을 읽고 있어.”
“무슨 책인데?”
“자네가 나에게 말을 하면, 내가 자네에게 말을 해야 하고, 그러니 그만 읽어야겠어. 한거번에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으니까. 자네가 나에게 말을 걸기 전에 난 소설을 읽고 있었어. <사막의 비너스>란 소설이야.”
- <은방울꽃 휴게소> 중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은 전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즐거웠구나 (0) | 2006.10.09 |
---|---|
블리치 23권 (0) | 2006.10.05 |
오레오 쿠키를 먹는 사람들 - 리처드 프레스턴 (0) | 2006.10.05 |
그리고 죽음 - 짐 크레이스 (0) | 2006.10.05 |
내 인생이 어떠한 결말을 맞이하든 나와는 상관없다 (0) | 2006.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