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 2007 여름호

 

 

 

 

 

 

지금 비평이란 장르는 비평가도 안 읽는 비평이란 자조적인 논평마저 감당해야 할 정도로 극심한 소외를 겪고 있고, 생경한 이론과 관념적 용어들로 장식된 과잉 수사로 인해 독자들과 단절된 사각지대로 내몰리고 있다.

 

 

 

지금 비평 혹은 비평가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솔직한 시각은 시가 너무 어려워 비평을 읽으면 좀 이해될까 하고 비평을 읽었더니 오히려 시가 더 어려워지고 말았다라는 아주 신랄한 비판에 직면해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스페인의 다음과 같은 격언이 보증을 받게 된다.

 명예와 돈은 같은 무대에 들어가지 못한다.

 

 

 

 

 

 

덕장에서

   

                         이건청

 

 

  백담사 가는 길 옆, 덕대에 코뚜레가 묶인 명태들이 줄줄이 걸려 있다. 명태는 명태끼리 등을 대고 매달린 채 혹한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데, 길길이 눈은 내려 절간을 덮고, 거기 닿는 길도 지워져 버렸는데, 바다는 첩첩 산 너머 아득한 곳에서 구비치고 있다. 코뚜레가 묶인 명태들이 덕대에 매달려 꾸는 꿈은 태평양인데, 해 뜨는 바다를 스쳐 달리며 언뜻언뜻 바라본 수평선인데, 얼고 녹고 다시 얼면서 몸이 마르는 황태 덕장에, 눈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내리면서 내 생애의 후반을 지운다.

 

 

 

 

 

 

 

 

 

 

떨어지는 나뭇가지들의 의미

 

                                고형렬

 

삼년 뒤 면목동을 찾아왔다, 이른 아침

대한 지나 가로수 가지치기작업 하러

기린과 사마귀를 구정 차에 싣고.

낯이 선 주민들과 가변건물의 길에서

유리창으로 뻗은 나뭇가지들을 쳐다본다.

인부들이 경쟁하듯 기린 목을 타고

플라타너스 가지 사이로 올라갔다.

슥삭슥삭, 톱이 가지를 자르기 시작한다.

가지는 굵기만큼 자르면 떨어진다, 아래로

딱딱한 가지들이 툭, 툭 길바닥에.

가지들은 모두 기이하게 생겨났다,

바닥에 떨어진 가지들은 혼란스럽다,

어떻게 떨어져 있어야 하는지 모른다,

이렇게 보도블럭에 떨어진 게 처음이라.

모든 가지엔 핏빛 겨울눈들이,

그 눈들이 시간의 의미를 되씹는 듯.

머리에 달린 사마귀의 가위를 쳐들고

하늘 옆의 잔가지들 삭둑삭득, 잘라낸다.

가지들이 공중에서 휭, 휭 떨어질 때

생가지들 입이 딱, 딱 소리를 냈다.

나는 가지의 낙하를 계속 보고 있었다.

인수봉의 해 비치는 소리가 귀따갑다.

 

 

 

 

 

 

 

 

 

 

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

 

                         이화은

 

밤새워

 

비 내리고 아침

 

둥글레순

 

그 오래 묵은 새촉이 불쑥 뛰쳐 나왔습니다

 

올봄도 온 우주의 대답이 이렇듯

 

간단명료 합니다

 

 

 

 

 

 

 

 

 

술 받으러 가는 봄

 

                          이화은

 

물병아리 한 마리가

,

반 되짜리 주전자 뚜껑만한 고것이

겁 없이 봄강을 끌고 가네

꼬리 물살이

풍경화 속 원근법 같기도 하고

후라쉬 비추고 가는 외로운 밤길 같기도 한데

고 뚜껑이 잠시 물속으로 잠수하도 해버리면

강은

덩치 큰 아이처럼 철없이 길을 쏟아버리고 마는데

반 되가

턱없이 말술이 되기도 한다는 걸,

오래된 풍경화 속 원, 근, 어디쯤에

후라쉬 불빛 가까이 들이대고 보면 거기

쭈그러진 아버지 반 되짜리 주전자

꽥꽤 혼자서 울고 있다네

술 받으로 가는 아이처럼 물병아리

달그락 달그락

추억 쪽으로 너무 멀리 가지 말거라

봄은 겉 늙어버린 덩치만 큰 아이 같으니

 

 

 

 

 

 

 

 

 

 

단풍

 

            박현수

 

한 그루의

타오르는 불꽃

세계의 한가운데에서

이글거리는 혀

무심코 뱉어낸 말처럼

 

떨어진 불꽃은

손아귀를

가만히 오므린다

다음에는

하느님이 떨어질 차례란 듯이

 

 

 

 

 

 

 

 

 

홍어

 

                 문혜진

 

내 몸 한가운데 불멸의 아귀

그곳에 홍어가 산다

 

극렬한 쾌락의 절정

여체의 정점에 드리운 죽음의 냄새

 

오랜 세월 미식가들은 탐닉해왔다

홍어의 삭은 살점에서 피어나는 오묘한 냄새

온 우주를 빨아들일 듯 한

여인의 둔덕에

코를 박고 취하고 싶은 날

홍어를 찾는 것은 아닐까

 

해풍에 단단해진 살덩이

두엄속에서 곰삭은 홍어의 살점을 씹는 순간

입안 가득 퍼지는

젊은 과부의 아찔한 음부 냄새

코는 곤두서고

아랫도리가 아릿하다

 

중복 더위의 입관식

죽어서야 겨우 허리를 편 노파

아무리 향을 피워도 흐르던

차안(此岸)의 냄새

 

씻어도

씻어내도

돌아서면 밥 냄새처럼 피어오르는 가랑이 냄새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밤

붉어진 눈으로

홍어를 씹는다

 

 

 

 

 

 

 

 

 

염소

 

                       강경보

 

일요일 한낮

TV에서 주주클럽*을 보고 있었지

양 한 마리가 느닷없이 박치기를 날렸어

가냘픈 몸매의 염소가 어리둥절 하는 사이

소총의 공이가 후퇴했다 전진하듯 양이란 놈이

또 한 번 박치기를 날렸지 아하,

저 놈이 날 공격하는 것이구나 염소 한 마리

문득 45도 방향에서 앞발을 들더니

높이 올린 몸을 45도 정면으로 틀면서 내려오더니

냅다 양이란 놈의 대가리를 받아버리더군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근데 가만 있자

저거 어디서 많이 본거 아닌가?

제 놈이 무슨 TV에서 김일 박치기를 본 것도 아닐 텐데

전진속공도 아니고 상대방의 머리채를 잡고 왼다리 번쩍

들었다 내리며 박아버리기 그 직전의 떨림 그

의도된 연출을 제 놈이 어떻게 알았냐 이 말이지

영락없는 김일이야!

양이란 놈이 끝내 도망치도록 쉴 새 없이 퍼붓는

염소의 공격을 감탄하며 보고 있는데

아들놈이 속절없이 채널을 돌려 버리더군

갑자기 내 마음이 발끈하는게 왜 그런지 모르지만

박치기 한번 날려보고 싶더군 돌아가신 울 아버지

온몸 벌벌 떨며 보시던 피투성이 레슬링

큰 일 날까 싶어 옆에서 조마조마 숨 꼴딱이던 내가

이제 어디 푸드덕 푸드덕 힘 쏟을 데 없을까

온 신경이 시퍼래지도록 안방 초원을 나뒹굴고 있었지

 

* 주주클럽: TV에서 방영하는 동물 프로그램

 

 

 

 

 

 

 

 

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의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 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었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힙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고인 물

 

                  서동욱

 

공원 바닥을

게으름 부리며 정리하고 떠난

인부들 덕에

비 갠 오후면

하늘 담긴 거울 하나

흙바닥에 생긴다

승용차를 타고 공원 내부까지 들어와서

도면을 들고 열심히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이 찾으면

늙은 경비원은 그 거울 앞에 불려 나와 난감한 표정이다

아이 사람들, 이렇게 흙만 슬쩍 덮어 놔 갖구는……

그러고는 구둣발로 주위의 흙을 쓸어

물구덩이 메우는 시늉을 해 본다

그런다고 되나요

 

저희들이 나중에 다시 해야죠

담배 한 대씩 나눠 피며 젊은이들은 관대하게 일을 마무리 짓는다

저무는 빛을 반사할 때면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아

빈 가슴 같은데

늙은 경비원은

만나기로 한 오랜 약속이라도 기억해 낸 듯

해지기 직전의 이 거울 앞에

몰래 서 보는 것이다

참 이상하지?

이렇게 마음이 아프니 말이야

나뭇잎 그림자라도

잠시 닿았다 다시

바람에 밀려 사라지면

그리워 참지 못하고

바람 지나간 자리 주름을 만들며

부르르르 떠는 고인 물

생명체의 자궁을 빌리지도 않고

우연히 태어났다가

 

이제 마른 흙 몇 삽이면 사라질

익명의 어떤 생명 한 조각

오늘도 혼자서 우주를 앓고

 

 

 

 

 

 

 

 

 

버드나무 여자

 

                        이정화

 

큰물이 막 지나간 방죽위에

한 여자 울고 있다

머리채를 휘어 잡힌 채

질질 끌려가고 있다

잡았던 손을 놓고 강물은

태연히 제 길로 가는데

어디까지 가려는가

붉은 진흙자국이 온 몸에

물음표로 남아있다

 

 

 

 

 

 

 

 

며느리 선지국밥 집

 

                             박미영

 

어느 한 맺힌 며느리였을까, 생각하며 그 집으로 들어갔지요

나이 든 노부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어요

2대 째라 하니 한이 곱이겠다, 가슴이 섬뜩했지요

유달리 똘똘 뭉쳐진 것 풀지 않고 있는 핏덩이

툭 건들며 풀어봐라 했지요

무심코 남의 한을 덥석 받아먹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얼굴 창백한 날이면 나도 모르게 찾게 되는 그 국밥

생각 없이 먹었다고 딴청 한 번 부려보고 일어섰지요

나는 돌아서면 금방 잊고 말아요

어느 날 또 그 국밥을 마주하고 앉아 있겠지요

 

동래 산성 오름 길 산 곳곳에 슬금슬금 핏기가 보여요

누군가 가을 산에 오지게 베었구나, 두리번거리며 동문을 들어섰는데요

선지 한 덩이 문 앞에 딱 걸려 있지 뭐예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