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진중권, 휴머니스트, 2005

 

 

 

 

 

 

 

상상은 정신의 놀이다. 상상을 할 때 정신은 노동을 하지 않고 놀이를 한다. 미래에는 노동이 유희가 될 것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예언은 맞았다. 비록 인류의미래는 공산주의의 것이 아니었지만, 상상력이 생산력으로 진화하면서 노동은 점차 유희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어린아이였을 때, 즉 자신이 영원한 존재라고 믿던 때를 모두 잊은 것 같다. (에드거 앨런 포)

 

 

 

상상력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폴 비릴리오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어린아이의 세계로 회귀하려는 성숙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초록빛 낙원이다.

 

 

 

루비콘 강을 건너며 카이사르가 남긴 말을 생각해보라.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이는 로마인들 사이에 주사위 놀이가 일상화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페르시아의 전설도 체스가 인도에서 발생했다고 말한다. 인도의 발힛 왕이 체스를 발명한 현자에게 상을 내리기로 했다. 상으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체스 판을 이루는 64개의 칸에 보리알이나 좀 채워달라고 했다. 첫째 칸에는 두 톨, 둘째 칸에는 네 톨, 셋째 칸에는 여덟 톨, 넷째 칸에는 열여섯 톨……. 왕은 현자의 소박함에 놀라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기로 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21 + 22 + 23……. 264, 이렇게 곱해 나가면 마지막 칸에 놓을 알곡의 수는 무려 922경 3372조 368억 5477만 5808톨이나 된다. 인도 전역에 서 생산된 알곡을 다 합해도 모자랄 분량이었다. 학창 시절에 배웠던 로그는 이렇게 체스와 함께 탄생했다.

 

 

 

중세에 광우는 일상의 일부였다. 르네상스 시대는 광우를 추방하고, 고전주의 시대는 광우를 감금했다. 그 이후 사회에서 바보를 보기가 힘들어졌다. 현실에서 철수한 광우는 무대 위의 허구로 거처를 옮긴다. 광우는 이제 연극의 광대가 된다. 16세기에 이탈리아 북부 파도바에서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라는 이름의 소극(笑劇)이 탄생한다. 이 가면극에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innamorati), 둘의 결합을 원치 않는 두 아버지들(vecchi), 그리고 이 가부장에게 봉사하는 두 명의 하인(zanni)이 등장한다. 우스꽝스런 짓을 하는 이 익명의 하인들은 곧 페드롤니노알레키노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중 페드롤니노가 후에 우리가 광대의 대명사로 알고 있는 피에로가 되고, 알레키노가 알레퀸이 된다.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는 광대처럼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하고 죽은 토끼에게 회화를 가르쳤다. 해프닝. 이벤트, 퍼포먼스를 할 때 작가들은 더 이상 화가나 조각가가 아니라 광대에 가까워진다.

 

 

 

미학자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 1903~1969)는 어리석음을 현대 예술의 특징으로 들었다. 아이들이 광대에게서 느끼는 공감은 예술에서 느끼는 공감이기도 하다. 짐승/바보/광대라고 하는 짜임새는 예술의 기본 계층이다. 합리성의 눈으로 보면 예술은 어리석어 보인다. 예술은 왜 어리석어지는가? 합리성에 미쳐버린 현대 사회를 심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작품의 어리석음은 현실 세계의 합리성에 대한 심판이다. 합리성의 추구가 광기로 치닫는 사회 속에서 진정으로 현명해지려면 예술처럼 어리석어져야 한다. 일찍이 사도 바울로는 이르기를,

너희 중에 누구든이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린도전서> 3장 18절)

 

 

 

불교에서도 이 사바세계를 덧없는 가상으로 본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현실을 표상의 세계, 즉 무상한 이미지의 세계로 보았다. 다시 그의 영향을 받은 철학자 니체는 모든 위대한 사상가는 이 세상이 한갓 가상에 불과하다는 위대한 영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천사를 그릴 테니 천사를 데려오라.(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

 

 

 

공짜로 앰비그램을 만들어주는 인터넷 사이트(http//ambigram.matic.com/ambigram.htm)가 있다.

 

 

 

오늘날 촬영 대본을 흔히 콘티라 부르는데, 그것은 몽타주의 연속성(continuity)을 강조한 그리피스의 영향이 남긴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날 휴즈에게 미키마우스로 분장한 한 남자가 찾아왔다. 월트 디즈니사의 퍼레이드단의 일원이었던 그는 휴즈에게 전설적 영웅은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대중과 숨바꼭질을 계속해야 한다.는 헌사와 함께 미키마우스 시계를 선물하려고 했다. 그러나 휴즈는 이 선물을 거절하면서 이르기를, 자신은 시간의 지배자라고 했단다. 비릴리오는 이 일화의 의미를 이렇게 푼다. 힘을 소유하는 것, 세계와의 놀이에서 승리하는 것. 그것은 개인 시간의 기준 잣대를 천문학적 시간의 기준틀에 일치시키지 않고 분리하는 것이다.

 

 

 

사라짐은 가장 원초적인 놀이다. 그래서 말을 못하는 갓난아기도 이 놀이는 즐길 수 있다. 언젠가 장인어른이 이나이나이나이나이~빠!라는 말과 함께 아직 젖을 먹던 우리 아기에게 얼굴을 보여주었다 감추었다 하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일본 말로 이루있다, 나이없다라는 뜻. 따라서 이 말을 우리말로 옮기면 아마도 있을까 없을까 있을까 없을까~ 빠!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이렇게 존재와 부재의 교차로 만들어낸 1비트의 정보. 그것만으로도 아기는 빙그레 웃으며 즐거워한다.

 

 

 

<시튼 동물기>에는 로보라는 늑대가 나온다. 워낙 영민하여 잡히지 않던 놈이었으나, 먼저 그놈의 아내를 잡아 미끼로 이용하자 냉정함을 잃고 결국 덫에 걸려든다. 인간에게 잡힌 로보는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쇠사슬을 끊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로보는 사슬의 중간을 땅에 묻는다. 그러면 마치 사슬이 끊어진 것처럼 보인다. 사슬의 중간을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 사슬을 끊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망가려고 할 때마다 사라진 사슬의 부분이 흙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변함없는 제 존재의 연속성을 주장했다.

 

이 예는 존재의 연속성이라는 당연한 지식도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후천적으로 습득한 추상적 사유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크리스토는 데이비드 카퍼필드처럼 의사당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그 역시 마술사이다. 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건물은 더 이상 과거의 그 건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포장은 존재의 연속성에 단절을 도입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보드리야르는 특히 크리스토의 제국의회 이벤트가 완전히 의미심장하다고 말한다.

 

 

 

바노초 비링구초(Vannoccio Biringuccio, 1480~1539)라는 이탈리아인은 자신의 저서 <신호탄에 관하여>(1540)에서 불꽃놀이에 대해 연인들의 키스처럼 덧없는 것이라 썼다.

 

 

 

이탈리아인들이 이 덧없음에서 연인들의 키스를 연상한다면, 일본인들은 거기서 다른 것을 떠올릴 것이다. 하늘에는 황홀하게 스러지는 하나비, 땅 위에는 일제히 피었다가 일제히 져버리는 벚꽃, 인간들 틈에는 제 몸을 불살라 짧은 삶을 살다 가는 사무라이. 하나비, 벚꽃, 사무라이는 일본식 존재미학의 정점이다.

 

 

 

순간을 향해 말하노니, 멈추어라. 너는 너무나 아름답도다. 불꽃놀이를 볼 때면 누구나 파우스트의 심정이 된다.

 

 

 

놀이에 열중한 아이에게 일상의 시간은 멈춘다. 놀이 속을 흐르는 것은 또 다른 시간대, 만화경도 마찬가지다. 만화경의 기둥 속에는 직선으로 흐르는 기독교의 시간과는 다른 불교적 시간이 들어 있다.

 

 

 

예로부터 미로는 다양한 것을 상징했다. 그리스인들에게 미로는 영웅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였다. 로마인들이 하던 트로이에 루수스는 말 다루는 솜씨로 성인이 되었음을 인정받는 의식이었다. 성당의 바닥에 그려져 있던 중세의 미로는 세상의 죄를 씻고 성소로 들어가기 위한 정화의식이었다. 선택과 미혹의 가능성을 허용하는 근대의 미로는 무지의 어둠 속에서 이성의 빛으로 길을 찾아내는 과학정신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현대의 미로는 카프카나 보르헤스, 뒤렌마트의 작품이 보여주듯이 대개의 경우 출구가 없는 부조리한 인간 실존의 알레고리로 상정된다.

 

 

 

미로에는 크게 세 가지 형태가 있다. 미혹의 여지가 없는 단방향(unicursal)의 고전적 미로, 갈림길에서 끝없이 선택을 강요받는 퍼즐형(puzzle)의 근대적 미로, 여기에 더해 탈근대적 미로라는 것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미로에는 입구도 없고, 출구도 없다. 따라서 입구와 출구를 잇는 유일한 해법도 없다. 여기서 하나의 길은 다른 것들과 교차하고, 그 길들은 다시 또 다른 것들과 어지럽게 교차한다. 이렇게 사방으로 무한히 확산되는 미로. 식물 뿌리처럼 얽혀 있는 이 리좀(rhizome)형 미로에는 안도 없고, 밖도 없다. 따라서 미로 밖으로 빠져나갈 수도 없다. 아니, 밖으로 나간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뒤렌마트에 따르면 미로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은 결구 또 다른 미로를 지어 덧붙이고 만다고 한다.

 

 

 

뒤렌마트는 미로에서 헤어 나오려면 벽 위로 올라가 미노타우로스에게 오줌을 내리 싸야 한다.고 말했다. 또 미로를 극복하려면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창조성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함이 필요하다. 그 천진함이 없을 때에 인간은 영원히 미로 속에 갇혀 버린다.

 

 

 

내가 가진 책에는 종이학을 접는 101가지 방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한 장의 종이로 편대 비행을 하는 열여섯 마리의 학을 접는 법도 있다. 실제로 해보니, 손놀림이 웬만큼 정교하지 않고서는 접기가 불가능하다. 얼마 전 서울에서 열린 어느 종이접기 전시회에는 단 한 장의 종이로 1,080마리의 종이학을 연출한 작품이 선보였다고 한다.

 

 

 

종이접기에도 극단(極端)이 있다. 레이 볼트라는 종이예술가는 BBC 방송의 협찬으로 실물 크기의 코끼리를 접었다. 여기에는 78제곱미터의 거대한 종이가 사용되었고, 이것을 접는 데에 한 사람이 손가락 한 개의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이것이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큰 오리가미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종이접기는? 와타나베라는 이름의 조교수가 접은 파닥이는 종이학이다. 가로, 세로 1밀리미터의 은박지로 만든 것인데, 눈에 보이지도 않을 이 조그만 종이를 접기 위해 와타나베는 현미경과 바늘을 사용했다. 점잖은 교수님이 이런 하릴없는 짓을 한 것은, 외과 의사의 수술 솜씨를 겨루는 경연대회 과제가 누가 가장 작은 학을 접느냐였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접기를 세계의 원리로 보았다. 세계는 모래알과 같은 입자가 아니라 레스토랑의 접힌 냅킨처럼 주름으로 되어 있다. 정신의 지각은 접기다. 지각의 작동은 영혼 안에 주름들을 형성하기에 모나드(monad) 내부는 주름들로 덮여 있다. 존재의 생성은 펼치기다. 그러나 이 주름들은 물질과 닮았는데, 이 물질은 이제 외부의 겹주름들로 조직되어야 한다.

 

 

 

들뢰즈의 말대로,

 

우리는 여전히 라이프니츠적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접기, 펼치기, 다시 접기이므로…….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란 곧 멀쩡한 시계와 고장 난 시계의 차이와 같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어린 나이에 죽은 딸을 닮은 자동인형을 만들어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현대인에게 오토마타는 더 이상 하릴없는 장난감이 아니다. 오늘날 그것은 예술(키네틱 아트)이요, 과학(사이버네틱스)이요, 생산력(로보틱스)이다. 기계는 점점 자연스러워져 인간을 닮아간다. 탱글리의 기계는 심지어 작품을 창조하기까지 한다. 반면 인간은 점점 기계화하여 인형을 닮아간다.

 

 

 

질서를 향한 열망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되, 무엇을 질서로 보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우르주스 베얼리(Ursus Wehrli, 1969~ )라는 사람이 있다. 코미디언, 엔터테이너, 디자이너를 겸한 스위스 태생의 예술가이다. 최근에 그가 하는 놀이가 어딘지 어머니의 일을 닮았다. 먼저 그림을 보라. 누구나 다 알다시피 아를에 살더 시절 벤신트 반 고흐의 침실이다. 작업을 할 때의 내 방 만큼이나 화가의 방도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베얼리는 이를 참을 수 없었다. 어지러운 방을 말끔하게 치웠다. 의자와 탁자, 그리고 액자는 침대 위로 올리고, 그 밖의 잡다한 물건들은 침대 아래 감추었다.

 

 

 

텍스트는 선형적이다. 서구처럼 좌에서 우로 쓰든, 아랍에서처럼 우에서 좌로 쓰든, 일본인들처럼 위에서 아래로 쓰든, 텍스트는 한 방향으로 쓰고 읽게 되어 있다. 하지만 원래 텍스트라는 말은 직물이라는 뜻이다. 씨줄과 날줄이 포개져야 진짜 텍스트가 된다.

 

미래의 글쓰기는 합리성의 씨줄과 상상력의 날줄로 이루어진 비선형적 텍스트, 가령 크로스워드 퍼즐을 닮아갈 것이다.

 

 

 

이 중의성 혹은 다의성이 단의미(monosemie), 즉 명석 판명함이라는 근대의 인식 이상과는 다른 탈역사의 글쓰기의 특징이다.

 

보통의 책을 읽을 때 독자의 눈의 높이와 각도는 늘 일정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시선의 각도를 바꾸어 눈을 책 옆에 바짝 붙여 기울이거나, 책을 90도 혹은 180도로 돌려봐야 할 때가 있다. 말하자면 독자가 몸을 움직여 시선의 각도를 계속 바꿔줘야 하는 것이다. 가령 연극을 보는 눈과 영화를 찍는 카메라를 비교해보라. 연극을 보는 눈은 움직이지 않고 늘 그 자리에 머무나, 영화를 보는 눈은 카메라를 따라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런 것을 동감각(kinaesthesia)라 하는데, 벤야민은 이를 현대적 지각의 특성으로 들었다.

 

 

 

다 빈치가 그린 회화 작품과 그가 고안한 기계들을 비교해보자. 전통적인 회화는 자연의 모방이었다. 거기서는 이미 존재하는 자연을 진실하게 모방하는 게 문제가 된다. 하지만 그가 구상한 발명품들은 어떤가? 그것들은 아직 없는 것을 있게 하기 위한 그림, 한 마디로 디자인에 해당한다. 디자인은 상상을 현실로 실현하는 그림이다. 그것은 다시(re) 한 번 이미 있는 것(present)을 반복하는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현실을 처음으로 있게 하는 현시(presentation)이다.

 

 

 

빌렘 플루서에 따르면 과거의 인간은 대상(object)을 보고 그것을 머릿속의 표상, 책 속의 텍스트, 혹은 캔버스 위의 형상으로 재현하는 주체(subject)였다. 하지만 미래의 인간은 자신의 꿈을 앞으로(pro) 던져서(ject) 실현하는 기획(project)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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