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만드는 여자
문정희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확실히 시인들은 사물을 아름답게 보는 경우가 많다. 오줌을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라고 써도 어색하지 않다니… 정말 대단하다. 몸 안의 노폐물인 오줌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건, 그것이 노폐물일지언정 자연스런 행위이며, 또한 대지에 유익할 수 있는 행위라는 폭넓은 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여자가 숲에 오줌을 누는 상황을 문정희 시인은 이토록 아름답고 풍성하게 표현하였으나, 나라면 그것을 다만 ‘노상방뇨’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화장실이 아닌 곳에다 오줌 싸는 여자를 굳이 다르게 말할 필요 없이 ‘노상방뇨 하는 여자’라고 써도, 충분히 아름답게 느끼기 때문이다.
노상방뇨를 왜 아름답게 느낄까? 거기엔 일종의 해방감이나 반항심 같은 것이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정해진 대로, 시키는 대로, 가르쳐 준 대로만 하는 삶에서 벗어난 삐딱한 자유가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대신 냄새가 좀 나고, 경범죄의 위험이 있고, 타인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일탈성이 느껴지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의 노상방뇨보다는 여자의 노상방뇨가 더 아름답다고 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여자는 남자보다 여러 면에서 더 억압되어 있고, 심한 경우엔 무엇을 더 억압당하고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자연스레 억압을 받아들이고 있기까지 하니까.
나는 지금껏 여자의 노상방뇨를 2번 목격했는데, 2번 모두 제대로 바라보지는 못했다는 것이 새삼 아쉽다. 한 번은 학교 다닐 때, 향교 근처의 골목길 대문 앞에서 한 여자가 노상방뇨하는 것을 지나쳤는데, 혹시 이 여자가 창피해할까봐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서둘러 지나쳤던 것이다. 이제와 생각하니, 당시 그 여자는 많이 취해있었고, 나름 시원함을 만끽하며 행복해 보였는데, 멋대로 창피할 거라고 생각한 것도 내 편견이었던 것 같다.
다른 한 번은 졸업 얼마 후, 한림대 철학과를 졸업한 한 여성과 종로에서 술을 마실 때였다. 자기는 술을 마시면 오줌을 참을 수가 없다며, 종로의 빌딩 사이로 들어가면서 나더러 누가 못 오게 입구를 지켜달라고 했다. 이때는 너무도 명확하게 빌딩 사이를 지키는 임무가 주어졌던 것이라 역시 노상방뇨하는 여자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핸드폰이 거의 없고, 레포트를 손으로 써서 내고는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첨단 디지털 생활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10년이 더 지나면, 정말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10년이 지난 뒤에도 노상방뇨는 있을 것이고, 그것은 윈도우의 휴지통 비우기처럼 클릭 몇 번으로 비워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배설이라는 원초적인 행위 자체가, 문명의 도구와 규범만으로는 가릴 수 없는 초 아날로그적인 것이므로, 요즘 시대에 그 자체만으로도 저항감이 느껴질 정도다.
그러므로 노상방뇨란, 적당히 숨어서 하되, 저항성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이면 더 좋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남의 집 담벼락 보다는 파출소 담벼락, 지나치게 어두운 곳보다는 적당히 환한 곳이 나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좋은 자리를 여성에게 먼저 양보하는 에티켓은 있어야 할 것이다. 나도 어서 내 여자친구가 노상방뇨하는 것을 보고 싶다. ‘내 귀한 여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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