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오후
겨울 오후 대전 버스터미널 가방 들고 지나갈 때 미친 여자가 배가 고파 그래요 천원만 줘요 손을 내밀며 말하네 난 코트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 꺼내 주며 말했지 천원 짜리가 없어요 물론 주머니엔 천원 짜리 지폐가 있었겠지 내가 이런 인간이다
차는 없지만 렉서스(Luxury car brand)급 다리를 갖고 있는 나는 걷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그런데 도심지를 걷다 보면 걸음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한푼 줍쇼 하는 거지와 도와 줍쇼 하는 장애인과 헌혈 합쇼 하는 헌혈 도우미들을 목격한다. 이들이 과속방지턱처럼 물리적으로 내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아니지만, 갈등과 고민 없이 무심하게 걷고 싶은 내 생각을 매번 덜컹 붙잡아 두고는 한다.
돈을 준다, 주지 않는다, 라는 식으로 확고한 결론을 내려놓은 사람은 괜찮겠지만 나처럼 어떤 게 좋은 선택인지 결정을 못 내린 사람은 매번 풀지 못한 문제를 다시 풀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돈을 줘? 말어? 진짜 거지? 가짜 거지? 속임수? 앵벌이? 사회복지단체가 차라리 낫나? 과연 그럴까? 등등의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다. 여기에 중고등학교에서 유일하게 배운 ‘계산법’(결코 수학이 아닌)이 더해진다. 적선 천원, 천 원을 벌려면 일을 해야 하고, 천 원이면 에비앙을 한 병 마실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을 한다.
언제나 쓸만한 결론은 못 내리고, 그때 그때 생각하느라 걸음을 멈추게 되는데, 그런 과정 끝에 헌혈 도우미에 대해서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지금까지 헌혈을 31번 했는데(모두 같은 맛이겠지), 호객행위 하는 헌혈 도우미에 의해 영향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만약 ‘오늘의 헌혈’ 양을 늘리는 게 목적이라면 방법이 잘못되었다. 아주머니들 대신 예쁜 아가씨들을 써서 남자들을 대상으로 꼬시는 게 훨씬 효과가 좋을 것이다. 미인계를 쓰는 것이 공공기관으로서 별로 좋지 않은 이미지라서 꺼려진다면, 헌혈 아줌마 또한 그렇다는 걸 알아야 한다.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헌혈을 강요하는 그들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으면 헌혈 하고 싶었던 마음도 사라질 것 같다.
나 또한 ‘이런 인간이다’. 나는 이런 인간인데, 이런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를 스스로도 인식하기가 어려워서, 대체 어떤 인간이고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지를 매일 생각하며 산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시인이란 매우 ‘이상적인 인간’일 것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욕망도 없고, 욕심도 없고, 이혼도 안 하고, 바람도 안 피고, 아가페 사랑만 할 것 같고, 다정하고, 따뜻하며, 인간애가 넘치고, 선한 존재로 착각하고는 하는데, 아마도 이 또한 한국 주입식 교육의 비참한 단면일 것이다.
실제로 당신 주변에 아는 시인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는 시인도 한 명 없으면서 어쩌면 그렇게 이상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는가? 아마도 또 세뇌 비슷한 걸 당했을 것이다.(세뇌야말로 우리 교육의 전공과목인듯)
시인이란 저마다 다르다. 몇몇 대학생들은 리포트를 그대로 베껴 제출함으로써, “우리는 같은 사람이다! 보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가!” 라는 주장을 하지만, 시인들은 서로 다른 존재가 되려고 애쓰고 있다. 시인이 어떤지 알려면, 시인을 만나서 잡담이라도 해보는 것이 더 정확할 텐데 한국의 교육 현장에서는 몇 만 명이나 된다는 시인들을 어딘가에 감춰두고 자꾸만 뻥을 쳐대고 있다.
선하게 보이기 싫은 어떤 시인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선하게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은 습관이다. 내가 이 원고를 2년 가량 쓰면서, ‘시를 읽으라’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음을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해봤자 안 읽을 테고, 인상 찌푸린 헌헐 도우미 아줌마처럼 부담만 줄 테니까. 그래도 어쩌다 시를 읽게 된다면, 제발 시를 ‘시처럼 읽으려는’ 행위만은 피해주었으면 좋겠다. ‘시처럼 읽는’ 시는 없다. 그냥 시를 읽으면 된다. 우리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나는 당신이 좀 더 당신다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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