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해, 문학세계사, 2001(초판1)

 

 

 

 

 

 

 

 

눈은 가볍다

서로가 서로를 업고 있기 때문에

내리는 눈은 포근하다

서로의 잔등에 볼을 부비는

눈내리는 날은 즐겁다

눈이 내릴 동안

나도 누군가를 업고 싶다

 

 

 

 

 

 

 

 

 

 

잠을 잘 시간에만 길이 보인다

꿈속에서만 세상을 걸어다녔는데

새벽녘에는 길이 다 지워져 있다

특히 잎 지는 가을밤은 더욱 그러하다

지상의 시간이 만든

벼랑과 벼랑 사이

떨어지는 잎새를 따라가 보면

, 그 시각에만 환하게

와등이 켜져 있다

 

 

 

 

 

 

 

 

인사동으로 가며

 

 

인사동에 눈이 올 것 같아서

() 밖을 빠져나오는데

누군가 퍼다 버린 그리움 같은 눈발

외로움이 잠시 어깨 위에 얹힌다.

눈발을 털지 않은 채

저녁등이 내걸리고

우모(羽毛)보다 부드럽게

하늘이 잠시 그 위에 걸터앉는다.

누군가 댕그랑거리는 풍경소리를

눈 속에 파묻는다.

()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내 생()의 그리움

오늘은 인사동에 퍼다 버린다.

 

 

 

 

 

 

 

 

 

 

 

 

입관(入棺)

 

 

누구에게나 아침이 있고

낮이 있고

저녁이 다 있건만

그 하루를 뜻대로 채운 사람은

오늘, 행복하다

팔 것 다 팔고

손털고 돌아가는 자 앞에서

내 오늘 머리 숙여 경배하노니

그대 지은 옷에서

며칠 후, 며칠 후라는 말의

실밥을 뜯으며

눈물짓는 까닭은.

 

 

 

 

 

 

 

 

찔레꽃 3

-         오월의 며칠은

 

 

오월의 며칠은 늦잠을 잘 수 없다

밤새도록 하늘에서 별들이 내려와

찔레덤불 위에

하얗게 앉아 있다

알몸으로 웃고 재잘거리는

애기별똥별

주먹이 눈부시다

오오, 귀여운 것

개중에는 내 손주도 몇 앉아 있다.

 

 

 

 

 

 

 

 

 

 

항해일지 3

 

 

아무리 노질을 해도 이 도시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구나.

물길은 사납고 며칠째 비가 오고 있다.

오늘은 노예선을 보았다.

5천만 톤의 선적 위에 그들의 고뇌와 슬픔이 못질되어 있었다.

여보, 이 배는 어디로 가지요.

황량한 을지로의 물목에서 손을 흔들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저희 배를 갖지 못한 자들의 노질을 바라보다가

선창을 닫았다.

어제 삼각지의 비오는 해협에서 침몰했던

한 불행한 남자(男子)의 난파 때문에

깊게 방수되어 있는 나의 조타실이 침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선창을 굳게굳게 닫아걸고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핑계삼아 읽다

비안개 속에서 어디선가 슬픈 무적(霧笛) 소리

길게 두 번 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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