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눈
눈은 가볍다
서로가 서로를 업고 있기 때문에
내리는 눈은 포근하다
서로의 잔등에 볼을 부비는
눈내리는 날은 즐겁다
눈이 내릴 동안
나도 누군가를 업고 싶다
길
잠을 잘 시간에만 길이 보인다
꿈속에서만 세상을 걸어다녔는데
새벽녘에는 길이 다 지워져 있다
특히 잎 지는 가을밤은 더욱 그러하다
지상의 시간이 만든
벼랑과 벼랑 사이
떨어지는 잎새를 따라가 보면
아, 그 시각에만 환하게
와등이 켜져 있다
인사동으로 가며
인사동에 눈이 올 것 같아서
궐(闕) 밖을 빠져나오는데
누군가 퍼다 버린 그리움 같은 눈발
외로움이 잠시 어깨 위에 얹힌다.
눈발을 털지 않은 채
저녁등이 내걸리고
우모(羽毛)보다 부드럽게
하늘이 잠시 그 위에 걸터앉는다.
누군가 댕그랑거리는 풍경소리를
눈 속에 파묻는다.
궐(闕)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내 생(生)의 그리움
오늘은 인사동에 퍼다 버린다.
입관(入棺)
누구에게나 아침이 있고
낮이 있고
저녁이 다 있건만
그 하루를 뜻대로 채운 사람은
오늘, 행복하다
팔 것 다 팔고
손털고 돌아가는 자 앞에서
내 오늘 머리 숙여 경배하노니
그대 지은 옷에서
며칠 후, 며칠 후라는 말의
실밥을 뜯으며
눈물짓는 까닭은.
찔레꽃 3
- 오월의 며칠은
오월의 며칠은 늦잠을 잘 수 없다
밤새도록 하늘에서 별들이 내려와
찔레덤불 위에
하얗게 앉아 있다
알몸으로 웃고 재잘거리는
애기별똥별
주먹이 눈부시다
오오, 귀여운 것
개중에는 내 손주도 몇 앉아 있다.
항해일지 3
아무리 노질을 해도 이 도시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구나.
물길은 사납고 며칠째 비가 오고 있다.
오늘은 노예선을 보았다.
약 5천만 톤의 선적 위에 그들의 고뇌와 슬픔이 못질되어 있었다.
여보, 이 배는 어디로 가지요.
황량한 을지로의 물목에서 손을 흔들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저희 배를 갖지 못한 자들의 노질을 바라보다가
선창을 닫았다.
어제 삼각지의 비오는 해협에서 침몰했던
한 불행한 남자(男子)의 난파 때문에
깊게 방수되어 있는 나의 조타실이 침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선창을 굳게굳게 닫아걸고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핑계삼아 읽다
비안개 속에서 어디선가 슬픈 무적(霧笛) 소리
길게 두 번 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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