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로드, 코맥 매카시, 문학동네, 2008(1판1쇄)
네가 머릿속에 집어넣은 것들은 거기 영원히 남는다는 걸 잊지 마.
남자는 하늘을 보았다. 잿빛 눈송이 하나가 날아들었다. 남자가 손으로 눈송이를 잡고 지켜보았다. 눈송이는 마지막 기독교도 군대처럼 소멸했다.
‘늘’이라는 것은 긴 시간이다. 하지만 소년은 남자가 아는 것을 알았다. ‘늘’이라는 것은 결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지 않는 달의 어둠. 이제 밤은 약간 덜 검을 뿐이다. 낮이면 추방당한 태양은 등불을 들고 슬퍼하는 어머니처럼 지구 주위를 돈다.
세상의 역사에는 죄보다 벌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생각을 하려 했지만 정신이 헤엄을 쳤다.
우린 아무도 안 잡아먹을 거죠. 그죠?
그래. 당연히 안 잡아먹지.
우리가 굶더라도요.
지금 굶고 있잖아.
안 굶는다고 했잖아요.
안 죽는다고 했지. 안 굶는다고는 하지 않았어.
어쨌든 안 잡아먹을 거죠.
그래. 안 잡아먹어.
무슨 일이 있어도요.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니까요.
그래.
그리고 우리는 불을 운반하니까요.
우리는 불을 운반하니까. 맞아.
알았어요.
남자는 초를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회색 빛 속으로 걸어나가 우뚝 서서 순간적으로 세상의 절대적 진실을 보았다. 유언 없는 지구의 차갑고 무자비한 회전. 사정없는 어둠. 눈먼 개들처럼 달려가는 태양. 모든 것을 빨아들여 소멸시키는 시커먼 우주. 그리고 쫓겨다니며 몸을 숨긴 여우들처럼 어딘가에서 떨고 있는 두 짐승. 빌려온 시간과 빌려온 세계 그리고 그것을 애달파하는 빌려온 눈(目).
남자는 떠오르는 모든 기억이 그 기원에 어떤 폭력을 행사한다고 생각했다. 파티의 게임에서처럼. 말을 다음 사람에게 전달하는 게임에서처럼. 따라서 아껴야 한다. 기억하면서 바꾸어버리는 것에는 알든 모르든 아직 진실이 담겨 있으니까.
어쩌면 그 생물들이 그에게 경고를 하러 온 것인지도 몰랐다. 무엇을 경고하러? 그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미 재가 된 것을 아이의 마음속에서 불로 피워올릴 수는 없다는 것.
사람들은 늘 내일을 준비했지. 하지만 난 그런 건 안 믿었소. 내일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어.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몰랐지.
설사 당신이 뭘 해야 할지 안다 해도 막상 닥치면 어째야 할지 모를 거요. 그렇게 하고 싶은지 아닌지 알지 못할 거란 말이요.
죽기를 바라십니까?
아니. 하지만 이미 죽었기를 바랄지는 모르겠소. 살아 있을 때는 늘 죽음을 뒤따라가게 되지.
아니면 아예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라던가요.
글쎄. 거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
그건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하시는군요.
벌어진 일은 벌어진 거요.
자기가 지상에 마지막 남은 사람인 줄 어떻게 알죠?
그걸 알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냥 그렇게 되는 거지.
누구라도 그걸 알 순 없을 겁니다.
하지만 달라질 게 뭐요. 자신이 죽으면 다른 모두가 죽는 것과 똑같은데.
저 아이가 신이라고 하면 어쩔 겁니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난 이제 그런 건 다 넘어섰소. 오래 있었거든.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에서는 신도 살 수가 없소. 당신도 알게 될 거요. 혼자인 게 낫소. 그래서 당신이 한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오. 마지막 신과 함께 길을 떠돈다는 건 끔찍한 일일 테니까. 그래서 그게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거요. 모두가 사라지면 좀 나아지겠지.
남자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가볍게 씨근거렸다. 난 죽을 거야.
남자가 말했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말해줘.
재에는 발자국이 안 남아요. 아빠가 그러셨잖아요. 바람에 날아간다고요.
이야기 하나 해줄까?
아뇨.
왜?
소년은 남자를 보다가 눈길을 돌렸다.
왜?
그런 이야기는 진짜가 아니잖아요.
진짜일 필요는 없어. 이야기니까.
그래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에선 우리가 늘 사람들을 돕는데 실제론 안 그러잖아요.
아빠는 정말로 용감해요?
중간 정도.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예요?
남자는 피가 섞인 가래를 길에 뱉어냈다.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거.
남자는 눈물이 그렁해진 눈을 들어 소년이 거기 길에 서서 어떤 상상할 수 없는 미래로부터 자신을 돌아보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그 광야에서 장막처럼 빛을 발하는 소년.
소년은 방수포로 천막을 치고 싶어했으나 남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무엇으로도 자신을 덮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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