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주목받는 젊은 시인들, 이숭원/황학주, 생각의나무, 2007(초판1)

 

 

 

 

 

(공룡)

 

            김중일

 

내 가슴속에는 누대로 부화를 기다려온

(공룡)이 있다 나는 저 도저한 권태의 숙주

좌심방 우심실 (공룡)이란 알을 품고 살고 있는

내 몸은 실핏줄 하나 하나 얽히고설킨

거대한 둥지, 붉고 거대한 둥지

하루 종일 (공룡)이 내 몸 속에서

몸 밖으로 쿵 쿵 쿵 발길질 한다

죽지도 않고! 그렇다고 태어나지도 않고

 

가슴에 품은 (공룡)이 너무 무거워 누구는

승강장 가득 울려 퍼지는 지하철의 레퀴엠 속으로

음악처럼 몸을 던지기도 하지만

난간 위에서 새와 함께 날아올라

자신의 붉은 둥지를 산산이 박살내기도 하지만

그 어떠한 사랑도 희망도 권태도

결국 깨뜨릴 수 없는, 부화시킬 수 없는

 

거리에 참혹한 (공룡)들이 쿵 쿵 쿵 잘도 다닌다

계단으로 무수히 (공룡)들이 올라갔다 내려간다

오늘밤에도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공룡처럼 거대한 어둠이 늦은 밤

일천만 (공룡)들이 잠든 서울 위로

아랫배를 대고 길게 눕는다

죄 많은 어미인 어둠은 오늘도,

태어나지 못하는 새끼를 품으며 밤새 흐느낀다

벌써 수천만 년 동안이나 하루도 빠짐없이

 

처녀 엄마가 아기를 업고

꼽추처럼 동네를 하염없이 왔다 갔다 하는 밤

나는 오늘, 좁고 굽은 골목길 속에서

내 안에서 쿵쿵거리며 뛰고 있는

(공룡)을 가만히 안아보려 한다 안간힘을 다해,

밖으로 나와 있는 두 팔은 허공만 끌어안고 있다

 

 

 

 

 

 

 

 

 

나무물고기

 

         박성우

 

뭉뚝 박힌 옹이가 물고기 눈알 같아

집 헐 때 나온 기둥에 끌을 댔다

 

저녁 강가로 나와 나무물고기를 판다

 

끌은 나무를 파고들어가

나뭇결 안에 켜켜이 쌓여들어 나무가 된

햇볕알갱이와 바람과 공기와 마른 물을 파낸다

눈발 내려놓는 소리와 빗발 죽죽 뻗치는 소리와

산짐승 발자국 소리와 아침저녁의 새소리를 파낸다

나뭇결 안에 켜켜이 쌓여들어 나무가 된

골짝 물소리와 날벌레 날갯짓 소리와

뿌리가 물 길어 올리는 소리를 파낸다

나뭇잎 지는 소리와 잔설 털어내는 소리와

새잎 돋는 소리와 고사리 꺾으러

산등성 오르던 할머니가 등 기대어오는 소릴 파낸다

나뭇결 안에 켜켜이 쌓여들어 나무가 된

봄여름가을겨울의 달빛과 별빛을 파낸다

 

끌을 치는 망치 소리도

나뭇결을 파고드는 끌 소리도 아닌

 

나무가 겹겹의 나이테를 둘러

결과 결 사이에 단단히 들어앉히던 것들, 빼내는 소리가

 

아무도 오지 않는 저녁 강물 위로 떨어져 퍼진다

 

아직 나무에 머문 것들은 나무물고기가 되고

 

 

 

 

 

 

 

 

물의 베개

 

              박성우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첫눈

 

      박성우

 

첫눈은 강물에게로 가서 강물이 되었다

첫눈은 팽나무에게로 가서 팽나무가 되었다

 

강물도 팽나무도 되지 않은 첫눈을

맨손으로 받고 맨손으로 모아,

꽁꽁 뭉친 첫눈을 냉장고에 넣었다

 

긴긴 밤 시를 쓰다가도

긴긴 밤 외롭단 말을 하려다가도

냉장고 얼음 칸을 당기면

첫눈 내리던 희푸른 밤이 찾아왔따

 

자울자울 졸던 강 건너 먼 불빛은

첫눈 내리는 강물을 찰바당찰바당 건너오고

눈발은 팔랑팔랑 팽나무 가지를 흔들어 깨운다

 

나는 첫눈 내리는 밤을 좁은 방에 앉히고

첫눈 내리는 밤과 조근조근 얘길 나눈다

찰진 홍시 내놓고 포근포근한 밤을 맞는다

 

첫날 며칠만 보내고 떨어져 사는 신혼 밤

첫날밤 내내 살을 녹이던 당신은

이내 내곁으로 와서 무릎을 베고 잠에 든다

 

그러면 나는 꺼낸 첫눈을 냉장고에 넣고

다시 외롭고 차고 긴 겨울밤, 잠자리에 든다

 

 

 

 

 

 

 

 

 

 

 

 

얼음을 주세요

 

                박연준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 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조차 신발 끈을 묶지도

오렌지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 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갈지도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보일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내 생리 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하며 몇 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이제 나는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겨울, 점점 여리게

 

                     박연준

 

창문 밑에 매달린 고드름들 사이로,

흐린 하늘에 목매달아 죽은 가오리연을 본다

하늘을 휘젓는 연의 시체는 부드럽다

까만 바람, 겨울은 낙타를 타고 걷는다

 

이따금 땅바닥에 흩어진

겨울의 부러진 발톱을 몰래 줍는다

주워들고는 죽은 구상나무 뿌리에 기우뚱 심어놓는다

구상나무는 아무것도 모르고 순하게 죽어 있다

뿌리에서 또 다른 슬픔이 자라는 줄도 모르고

죽은 몸과 자라나는 슬픔 사이의 여백이 차갑다

 

애인은 겨울을 건너, 봄으로 갔다

 

내 발가락 사이사이 틈

꼬아진 다리 사이

멀리 돌아온 입술과 입술의 포개짐에도

서글픈 여백이 맺히고,

갈변한 사과를 반으로 쪼개면

속살은 여전히, 잊혀진 듯 희다

 

 

 

 

 

 

 

 

 

 

늙은 연둣빛, 터널

 

                 박연준

 

어느 날 밤, 내가 침대 끝자락에 매달려

쏟아지는 피처럼 녹고 있었을 때

딱지 아래서 울고 있을 싱싱한 상처와

미라처럼 죽음으로 꽃 피울 아침과

마침표 위로 서툴게 떨어지는 말,

뒤늦게 대가리를 박으며 흐느끼는 말들과

다만, 엮이고 싶었다

 

거미의 가느다란 다리가 내 텅 빈 몸을 감싸 쥐고

늙은 연둣빛, 터널을 지나자

죽겠다고, 떨어져 내리겠다고

마른 가지 위에서 꽃들은 시위를 하고

진딧물들은 내 이빨 사이로 파고든다, 더 이상

봄은 없을 거라고

거미들은 바삐 다리를 놀리고

실타래를 풀어 오선지를 만든다

오선지 위에서 무너지는 음표들은 노래한다

늙지 말아요, 얼굴이 노란 죽음이여

직각으로 뻗은 하늘이여

나이를 먹는다는 건

조금씩, 넓어지는 감옥에 갇히는 일이라고

바람이 불고, 벽이 자란다

 

 

 

 

 

 

 

 

 

 

 

육친(肉親)

 

                  손택수

 

책장에 침을 묻히는 건 어머니의 오래된 버릇

막 닳인 간장 맛이라도 보듯

눌러 찍은 손가락을 혀에 갖다 대고

한참을 머물렀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곤 하지

세상엔 체액을 활자 위에 묻히지 않곤 넘어갈 수 없는 페이지가 있다네

혀의 동의 없이는 도무지 읽었다고 할 수 없는 페이지가 있다네

연필심에 침을 묻혀 글을 쓰던 버릇도 버릇이지만

책앞에서 침이 고이는 건

종이 귀신을 아들로 둔 어머니의 쓸쓸한 버릇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다고

아내도 읽지 않는 내 시집 귀퉁이에

어머니 침이 묻어 있네

어린 날 오도독 오도독 씹은 생선뼈와 함께

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던 그 침

페이지 페이지 얼룩이 되어 있네

 

 

 

 

 

 

 

 

 

 

 

 

 

찬미들, 안녕

 

                 정영

 

잘못 배달된 피자였다

 

주문한 자들은 간절히 기다리고 있겠지만

이미 길 잃고 내게 왔으므로

내칠 수 없는 연이었다

 

내가 세상에 배달되던 날도

주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집은 텅 비어 있었으니까

 

아버지가 처음 나를 내려다보았을 때

모래구름이 내려와 심장의 봉분을 만들어주었다

태어난 이후로 내가 가장 빨개지자

바람의 영혼들이 인사했다

붉은 상자야, 안녕

 

나는 내 눈동자 속으로 걸어들어가

다락방 고양이들의 출산을 훔쳐보았다

검은 고양이가 점박이 새끼를 낳을 땐

어머니가 눈이 멀 것처럼 울었다

밤과 낮이 엉켜 나를 조금 닦아주었다

바람의 눈동자들이 인사했다

붉은 운명아, 안녕

 

우우- 바람에게 불려나오는 내 붉은 찬미들!

 

촛농 되어 불타는 꿈틀거림들아, 안녕

불안에 떠는 그림자 속의 그림자야, 안녕

먼 훗날 카페에서 극장에서 태양의 해변에서

다시 떠들게 될 나의 이명들아, 안녕

눈 감고 뛰어다니는 저주의 말들아, 안녕

나는 붉은 상자야!

 

나는 생애 여러 번

주문한 적 없는 피자를 배불리 먹었고

행복했고 아무 생각 없이 잠들었다

 

잘못 배달된 나여!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의 겨울

 

                              황병승

 

 

 태양남자 애인 하나 없이 46억 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지구를 비췄다 왜, 무엇 때문에, 무슨 영화(榮華)를 누리겠다고. 여름, 일 년에 한 번 나 자신을 강렬하게 책망했다.

 

 늙은 나무들 과수원 바닥에서 사과 배 대추 감, 열매들이 떨어질 땐 너희들이 먹어도 좋다는 게 아니고 우리들이 또 한번 포기했다는 뜻이다, 가을

 

 미스터 정키 어떤 계절은 남녀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뜨겁고 도 어떤 계절은 순식간에 싸늘해져서 남자도 여자도 그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뿌리부터 차가워지지

 

 힙합 소년 j 친구들은 늘 우정이 어쩌구 선후배가 어쩌구 떠들어대지만 스윗 숍(sweet shop) 앞을 지날 때면 부모 형제도 몰라봅니다 친구들은 커서 달콤한 가게의 핌프(pimp)가 되겠죠

 나는 다릅니다 나는 생각이 있어요 붓질을 잘 하면 도배사 하지만 글을 배워서 서기(書記)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이소룡 청년 차력사인 아버지의 쉴 새 없는 잔소리에 머리가 늘 깨질 듯이 아팠다 쌍절곤 휘두를 힘도 없다 가끔 정키 씨를 불러 리밍*을 시켰다

 

 저팔계 여자 벽을 따라 개처럼 걸었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볼륨을 높였지만, 녀석들의 킬킬거리는 소리가 땅 파는 기계처럼 내 몸을 흔들었죠……

 그러나 더는 울지 않는 여자, 거리의 핌프들에게 심한 모욕을 당한 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날마다 순돈육 소시지를 먹었다

 

 그리고 겨울 날개를 가진 짐승들은 모두 남부 해안으로 떠나고 이제 비유 없이는 g나 발짝도 전진할 수 없는 계절

 

 깊은 밤이었고 눈이 내렸다

 스윗 숍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은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 전체로 번져 나갔다

 

 늙은 나무들은 포기를 모르고 맹렬히 타올랐다

 힙합 소년 j는 달콤한 가게의 구석방에서 창녀 셋과 뒤엉킨 채 숯불구이가 되었고

 이소룡 청년은 차력사인 아버지를 때려눕히고 아비요! 교성을 지르며

 늙은 남자의 항문에 쌍절곤을 쑤셔 박았다

 죽음도 삶도 아닌 세계, 붉은 해초들이 피어오르는 환각 속에서

 미스터 정키는 끝없이 헤엄쳐 나갔고

 태양남자, 언덕 위에 누워 46억 년 만의 휴식처럼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의 겨울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만든 불일까, 잘 탄다

 

 저팔계 여자는 순돈육 자지를 달고 불 속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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