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지식을 습득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예전 심리학 책에서 읽었던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를 생각 중인데
떠오르지가 않는다. 인터넷을 찾아본다.
첫째가 부정, 둘째가 분노, 셋째가 타협, 넷째가 우울, 다섯째가 수용.
오늘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를 새삼 생각해보는 이유는,
오늘 아침, 내가 공모전을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고,
그 순간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와 동일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말도 안돼.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떨어지다니!
강한 부정.
역시 공무원들이란! 정말 참을 수가 없는 노릇이야! 공정하지 않아!
그리고 분노.
그리고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어쩌겠어. 보는 눈들이 그 모양인걸. 사실 별로 준비 안 하고 급하게 응모한 거잖아.
의 타협.
후우…
우울.
할 수 없지. 잊어버리자.
수용.
공익광고 공모전에 응모를 하고, 떨어졌을 때 겪게 되는 감정의 단계가
죽음을 선고 받은 환자가 겪게 되는 감정의 단계와 흡사하다는 건
신기하지만 이해가 가는 일이다.
삶이란 언제나 죽음과 함께 하는 거라는 말이 이해가 간다.
사랑하는 애인에게 차인 순간, 사람은 죽음을 경험한다.
오랜 시간 준비해오던 취업 시험에 떨어졌을 때도, 사람은 죽음을 경험한다.
어떤 고3 수험생의 경우, 수능 시험을 치르고 죽음을 경험하는데,
그 경험이 너무도 지독해 실제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우리는 살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무수히 죽음을 당한다.
나는 오늘 죽었고,
살았고,
나도 모르게 죽음을 경험한다.
하긴 매주 일요일 밤마다
경험하는 일이다.
삶이란, 삶과 죽음을 둘 다 경험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사는 게 괴로운 건 당연한 일이다.
사는 게 괴롭지 않은 사람은
죽는 것도 괴롭지 않은 사람이다.
웃으면서 살고 웃으면서 죽는다는 게
그런 뜻인가 보다.
죽음에 이르는 다섯 단계 중에서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는 건
아마도 수용의 단계일 것이다.
받아들이는 단계.
내 삶의 모든 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불편한 것, 내 취향이 아닌 것들을
다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삶이 편안해질 것이다.
어쩌면 그런 것이 관조의 삶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죽음 같은 삶이다.
혹시 죽음은
그리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삶을 자극하여 일으키거나
혹은 아예 꺼버리거나.
어쩌면 나는, 우리는
죽음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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