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생각이라는 걸 해봅니다
회사에 나왔습니다.
이번 달에는 피자배달부의 월급을 받았습니다.
한 160만 원 정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피자배달부를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나는 피자배달부가 할 수 없는 일을 한다는 생각을 하며
피자배달부 보다 많은 시간을 일하는데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 틀린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정체성의 혼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회사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데
받는 내가 부끄러웠습니다.
월급을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났고,
이제 그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생각이 날까 모릅니다.
때때로 사는 게 참 잔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돈 얼마에도, 약간의 사고나 실망에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도
바르르 떨리는 잔물결의 파장으로 삶이 이루어진다면,
분명 스스로에 대해 실망할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깊은 물, 넓은 물을 꿈꿉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다를 좋아하고, 바다에 가는 걸 좋아하고,
때로는 팔을 벌려 바다 흉내를 냅니다.
바다 앞의 귀뚜라미처럼 촐딱거리며
내 청춘이 지금 바다를 덮고 있거나
바다로 나아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재미를 즐깁니다.
그러나 다시 도시로 돌아오면서 삶은 졸아듭니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겁나는 것들이 참 많고
겁나는 것들이 많아서 안절부절해지고
안절부절하다 졸아버립니다.
그렇게 얕은 물이 되어서
월급이 얼마 깎였다는 것을
사건이나 인과 관계로서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인생의 실패니, 위기니, 억울함이니, 자존심의 상처니, 복수를 해야겠느니
감정적인 파장에 휩싸입니다.
그나마 이런 일들을 친구나 회사 동료들과 둘러앉아
시시콜콜 떠들어대지 않을 수 있을 정도의 참을성을 발휘한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약간이나마 위로를 얻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그런 식으로 떠들거나, 모여서 분노를 토로하기에는
어쩌면 지나치게 사소한 일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80살 까지 산다면,
그 속에 2009년 4월 어느 날 월급 160만원을 받았다는 건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입니다.
내가 분노해야 한다면, 바로 그렇듯, 내 삶이 아무 의미 없는 것에
쉽게 파장을 일으키고 영향을 받음으로써
아무 의미 없는 것과 동일화되는 현상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만약 우주라는 일기장을 지니고 있다면,
이 우주 속 지구라는 별 한국이라는 나라 서울이라는 도시
그 속에서 100여명 정도가 일하는 한 회사 그 속의 한 남자가
월급이 적게 들어왔다고 한숨 쉬거나 분노하는 일을 적을 때
참으로 가치 없는 일기를 적고 있구나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내 일기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 일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방법은 있을 겁니다.
월급이 깎이고 자신이 일하는 것만큼의 대가를 못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게 받은 월급이나마 쪼개서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
라고 쓸 수 있다면 그 파장은 좀 더 가치 있는 파장, 울림 있는 파장일 것입니다.
내 이익이 얼마 깎였다는 것에 발끈하는 값싸고 천박한 파장은 아니겠지요.
예를 들어, 월급이 적게 들어온 것에 발끈한 사람이 다음 달
4백 만원 정도의 보너스를 받는다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며
지난 달의 암울함이나 상처받았다고 느꼈던 감정은 다 잊어버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이번 달 월급을 받으며 생각하거나 느꼈던 것들은
고작 돈 몇 백 만원에 묻혀버리거나 삭제될 수 있는
돈으로 쉽게 대체될 수 있는 경험인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버는 이유가 살아가기 위해서고, 살아가는 것이
삶을 경험한다는 것이라고 한다면
월급이 깎이고 입사 이래 단 한 번도 연봉을 올리지 못한 현실도
경험이며 삶일 것입니다.
누군가는 계란 하나를 라면에 넣어 먹을 줄 밖에 모르지만
누군가는 이 계란을 이용해서 다양한 요리를 즐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몫을 받지 못한다는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읽거나 내 삶 속에 기록할 것인가에 대해
누구나 다 하듯이 발끈하고 속상해하는 것, 또는 술 마시며 누군가를
지탄하는 것밖에 못한다면
참 그 삶 가치 없다
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게 이번 달 내 삶입니다.
월급을 1600만원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삶이 가치 있다고 느낄 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가 월급 160만원을 받으면서 가장 크게 즉각적으로 느낀 기분이
내 삶이 가치 없다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 이에게 월급을 올리고 올리고 올려주면 그는
내 삶의 가치가 올라가고 올라가고 올라간다고 느낄 것입니다.
책 속에서 그런 사람을 보면
참 생각이 얕다.
삶이 돈이나 남들이 정해놓은 평가기준에 쉽게 오락가락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내가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의 월급이 낮았다가 높았다가 다시 낮았다가 다시 높아지는 것이
그 사람의 가치가 낮았다가 높았다가 다시 낮았다가 다시 높아졌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그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벌어들이는 돈과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
저의 기준입니다.
그 사람의 가치는
그가 자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어떻게 스스로 증명해내느냐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어려운 사람을 도움으로써 가치를 증명하고,
누군가는 전쟁을 막거나 나라를 지킴으로써 가치를 증명하고
누군가는 남들이 하지 못한 생각을 하거나 글을 씁니다.
어쩌면 내가 하는 이 ‘일’에서도
그런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열심히 찾아본다면 말이죠.
그런데 사실 쉽게 찾아지지가 않습니다.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해도 되는 일일뿐더러,
딱히 누구에게 도움이 되거나 사회에 이바지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저 돈 벌기 원하는 어떤 기업이 더 많은 돈을 벌도록 애쓰는데
도움을 줄 뿐이죠.
그 기업이 왜 그렇게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하며, 그 번 돈을 어떻게 쓰며
그 기업이 그렇게 돈을 버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모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런 일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만의 목적과 당위성을 지닌 일을 하는 것이라기 보다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인 일들을 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 일과, 그 일에 대한 가치를
돈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4년 째 임금이 동결되고
심지어 월급이 깎여 나갈 때
용돈 받으며 일한다거나
요즘 피자 배달해 라고 말하며
깎여나간 자신의 가치에 대해 자조 섞인 말을 내뱉습니다.
월급 몇 십 만원이 오르면 행복해지고
월급 몇 십 만원이 내리면 불행해지는 인생은
다 졸이고 나면 뭐가 남을까요?
바닷물이 졸아들면, 소금이 남습니다.
바닷물이 졸아들 때, 염전에서는 해와 바람이 일하는 시간이라고 한답니다.
바닷물이 졸아들고 해와 바람이 일을 하면 소금이 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졸아들고 나면
세상에 무얼 남길 수 있을까요.
지금의 나에게서는 짜증과 실망, 분해되지 않는 혐오감
정도가 남게 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그렇게 쉽게
졸아듦을 느끼고 싶지 않습니다.
성냥불에도 달아오르는 정도의 높이와 넓이를 지니고 싶지는 않으며
달아오른다면 그것이 돈 몇 십 만원의, 혹은 몇 백만 원의 대우로 인함이 아니라
불의나 불평등, 그런 것 때문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나의 급여가 곧 나의 불평등한 처지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만,
정말 내가 불평등과 불의를 느꼈다면 참지 말고 행동해야 하기도 합니다.
적당한 항의 방법을 모색하고 실행할 수 있는 용기나 결단력이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불만을 느끼며 그저 참고만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지닌 또 다른 불쾌한 특성이 드러납니다.
눈 돌리기. 불의를 받아들이기. 참기. 튀지 않기 등이 될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성장한다는 느낌을 받길 간절히 원합니다만,
이런 식으로 눈 돌리고, 받아들이고, 순응하면서
작아집니다.
어깨가 좁아지고, 시야는 기껏 자동차 팜플렛에 머물고,
허리는 굽고, 머리는 보험료를 계산하는 데 사용합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지금의 내가 나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고
이상적인 모습의 나로 변화되고 싶기 때문입니다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런 나의 생각을 난 대체 누구에게 하고 있는 건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지나간 시간은 지나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지나간 시간에 그대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우주 어딘가에는 내가 기억하건 못 하건
내가 겪은 모든 사건들과
내가 겪지 않았으나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넓은 기록 창고에 지금 하는 이 생각을
보관해두고 싶은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나도 끝까지 노력하겠으나,
내가 못하면 다른 누군가라도
이렇게 잔 물처럼 살지는 말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낍니다.
달에 사는 탄소 알갱이 하나가 지구를 바라보았을 때
월급 160만원에 쩔쩔매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 편, 요즘처럼 잘 나가는 사람 많은 세상에
월급 160 받는 무능력자를 좋아할 여자 또한 하나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몹시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이 월급 160만원 사건은 내게 큰 충격이었던 건 분명합니다.
어쨌거나 물이어서, 늘 그대로인 줄 알았기 때문에 내 얕음을 알지 못했으나
월급 160만원이 내 안에 툭 떨어질 때
물방울은 총소리에 놀란 비둘기 떼처럼 하늘로 날아오르고
수면에 떨어진 돈이 수중으로 가라앉기는커녕
바로 바닥이 드러나서
이런, 나는 아예 수면밖에 없는 잔 물이었군!
이라고 충격을 받은 겁니다.
어쨌거나 이건 내게 중요한 경험임은 분명합니다.
어쨌거나 누군가 내게 돌을 던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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