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되는 자
어려서의 꿈은 비행기 조종사였다.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봤을 법한 꿈.
트렌드에 따라 더 많은 탈 꺼리들을 알게 됨에 따라
에어울프 조종사, 배트카조종사, 에반게리온 및 건담 등의 로봇 조종사,
우주선 조종사, 회장님차 조종사, F1조종사, 요트 조종사, 잠수함 조종사,
미래소년 코난에 나오는 팔다리만 있고 선장이 주로 타고 다니는 거시기 조종사 등으로
진화 혹은 변주되며
아 꿈이란 이래서 꿈이로구나
자유자재로 변해가며 뭐든지 선택할 수 있고 될 수 있고
되 보지 못해서 더 짜릿하며
꿈인 줄 알면서 꾸는 꿈처럼
결국 이루지 못할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빠지게 되고
또 결국 이루지 못할 걸 알기 때문에 해보지도 않게 되고
또 잠에서 깨고 난 뒤의 달콤한 꿈에 대한 아쉬움처럼
깨져버린 뒤에도 그저 그런 정도의 아쉬움 밖에 느껴지지 않고
(죽을 정도의 고통일 줄 알았지만... 분쇄골절만도 못하던 걸... 통증이...)
아무런 악당의 방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패배하고
누구도 이간질 시키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멀어져 가는
그런 거구나 알게 되었다.
그래도 하루 종일 뭔가를 조종하고 있기는 한데
그게 뭐냐 하면 컴퓨터다.
켜고 (켜지길 기다리고)
문서 창을 열고 (열리길 기다리고)
프로그램을 작동시키고 (작동 되길 기다리고)
인터넷을 넘나들며 (넘어가주길 기다리며)
하루 종일 컴퓨터를 (컴퓨터님이)
조종한다. (조종되어 주길 기다린다.)
회사 컴퓨터를 다루다가 생긴 요즘의 버릇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메인 화면만 줄기차게 보는 것이다.
포털 사이트에 호기심 가는 헤드라인이 떠도 결코 클릭하지 않는다.
그냥 옆 사람에게 묻는다.
이런 소식이 있던데 무슨 내용이에요? 하고.
마이클 잭슨 사망이라는 타이틀을 봤을 때도
점심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밥 먹으며 물었다.
마이클 잭슨이 죽었나요?
왜냐고?
인터넷 헤드라인 하나 클릭하면 기사 뜨기를 30초 가량 기다려야 하니까.
실제로 초를 재보진 않았지만 심리적 시간으로는 매번 30분은 족히 기다리는 기분이다.
그래서 요즘은 헤드라인만 보고
내용은 클릭하지 않는다.
아예 오래 전처럼, 혹은 올 여름 이집트 갔을 때 보았던
카이로의 컴퓨터들처럼
뭐 하나 다운 받으려면 24시간 기다려야 되는 시스템이라면
그 시간 동안 다른 걸 할 수 있을 텐데
이 어정쩡한 15초, 25초, 45초의 시간 동안은
다른 뭘 할 수도 없고,
이 명령이 완료되면 다음에 내릴 명령을 준비한 채로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빨리 끝내고 싶어서)
그냥 무작정 기다려야만 한다.
내가 컴퓨터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에 조종당하는 기분이다.
대체 언제 되는 거야 커피나 한 잔 하고 올까?
(만약 하루 중 대체 언제 되는 거야? 라는 기분이 들 때마다 커피를 한 잔씩 마신다면
하루 동안 40잔 가량은 마시게 될 것을 내 장담한다.)
라고 생각하며 의자에서 반쯤 일어서면 창이 열리고
다시 앉아서 그 창에서 필요한 검색어를 입력 시키고 엔터를 누르면
또 아무 것도 못하고.
이 명령이 실행되길 기다리는 동안
다른 창에 다른 명령을 내려놓거나
인터넷에 검색어를 입력하고 검색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문서 작업을 하려고 하면
컴퓨터가 저절로 멈춰버리고,
한 번 멈추면 다시 껐다 지금 상태까지 세팅하기 위해
20분은 족히 걸리고…
라면이 끓는 3분 동안 경험하게 되는 제약은
(밖을 나갈 수도 없고, 책을 펴도 몰입되기 부족하고, 샤워하기에도 부족하고,
그냥 막연히 기다리기엔 남고 하는 제약. 일명 사람 어쩡쩡하게 만드는 저주.)
컴퓨터 앞에서 경험하는 기다림에 의한 제약에 비하면
참으로 스마트한 광고주라 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의 회사 컴퓨터가 스페셜하다 못해 프레스티지 급으로 느린 편이긴 하지만
컴퓨터의 발달 만큼이나 그것을 컨트롤하는 속도도 빨라지는 만큼
이런 갑갑함, 이런 구속감, 이런 막연함은 계속 될 수밖에 없고,
프로그램들이 고성능화되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용량이 커지고
뭐 하나 살펴 보려고 해도 이것 저것 설치하라는 요구가 많아지면서
야 이거 진짜 우리 제 무덤 파고 있는 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광고 표절도 그렇고.
학생 때의 나의 생각으로는
무슨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
좋아 이 아이디어가 다른 데 있을지 모르니 뒤져보고
만약 비슷한 아이디어가 있다면 이 아이디어를 포기하거나
완전히 다르게 바꾸자, 라고 할 줄 알았는데
막상 현실은,
무슨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
이런 걸 과연 만들 수 있을까? 참고할만한 게 없잖아?
위험하니까 저기 다른 데서 만든 것들을 보고 활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자라는 식의
예상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독창적인 아이디어일수록 찾아도 레퍼런스가 없는 것이 정상일 텐데
찾아도 레퍼런스가 없는 아이디어 보다는
레퍼런스가 있는(그것도 같은 업종인 광고에!!!!!)
그럼으로써 그 아이디어가 독창적이지 않음을 스스로 고백하게 되는
그런 아이디어들을 선호하게 되는 현실을 보게 되는 것은
오래 전 내 스스로에게
그래 난 우주선 조종사가 될 수 없을 거야
라고 말할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죽을 것처럼 슬플 줄 알았는데 뭐 그닥...
서로(회사도) 서로(나도) 조소가 늘었을 뿐.)
아무튼 이런 식의 현실의 벽을 실감하는 단계에 오기까지도
무수하게 종일 이 컴퓨터님이 작동되어주기를 기다려야 하니
참으로 뭔가를 조종하는 맛! 이라고는 느낄 수가 없다.
BMW가 항상 드라이빙의 맛, 쾌감을 강조하고는 했는데
컴퓨터도 좀 그렇게 조종하는 맛! 을 느끼게 좀 만들어주고
세팅 해주면 안 될까?
맞아! 아예 BMW에서 컴퓨터를 만들면 안 되나? 포르쉐에서 911컴퓨터 만들면 안 되나?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제목 맞나?)를 보면
사람들에게 더 많이 일을 시키기 위해 기계를 점점 더 빨리 돌리지 않나?
컴퓨터도 좀 그렇게 빨리 작동되게 해서
내가 더 많이 빨리 일하게 해주고
컴퓨터 때문에 짜증나서 이런 거 쓰느라 일하는 시간이 줄게 되는
부작용도 줄여주고 하면 좋을 텐데... 쯧. 컴퓨터 창이 열리길 기다리는 동안 가을이 와버렸네.
ps. 일 하는 척 하기 위해서 문서창에 이 걸 쓰고 있는데,
이걸 쓰고 나서 다시 여기에 옮겨 붙이기 까지
몇 번을 클릭하고 몇 번을 기다려야 할 지를 생각하니 한숨이… fly... 훨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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