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2011봄
개화
이호우
꽃이 피네, 한 잎 두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꽃잎∙이
김수영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싫은 노란 꽃을
변경의 꽃
마종기
우리들의 의욕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무너지는 흙 속에서
우리들은 매일 아침 눈떴다.
그러나 씨를 맺기 전에
바람에 날리는 꽃.
모든 열성劣性의 꽃은
바람이다.
모든 열성劣性의 꽃은
바람의 연료燃料다.
변경의 내막은
아직도 아픔이다.
만날 수 없는 망설임이
모두 깃발이 되어
높은 성루에서 계속
꺾이고 있었다.
우리들 몸 안에서 끝나는
열성인자劣性因子의 사랑.
아프지 않고는 아무도
불 탈 수 없다.
꽃 같은, 또는 개
이화은
목백일홍나무 밑에서 개가 새끼를 낳았다
꽃판 같은 붉은 젖꼭지에 매달린
희고 검은 여섯 송이 강아지들
올해 들어 세 번째
마지막 꽃을 피운다는 늙은 나무가
젖을 다 빨리운 어미개처럼
허리가 굽은 채 일어서는데
등에 업힌 어린 꽃들이 오물오물
입질하는 법을 저혼자 배운다
꽃과 개와 가을과,
저들은 잠시 몸을 바꾼 것일까
낯선 나와 아득한 풍경이 서로 마음을 뒤섞고 있는데
새끼를 토해 낸 무한천공 어미개의 눈 속으로 흰나비가
팔랑팔랑 한 떼의 허공을 몰고 겁도 없이 날아가고
도대체 이 만개한 가을은 어디서 굴러먹던 뼈다귀란 말인가
새 풀이 돋을 때까지
-참회, 2010~2011
이향지
풀밭도 없는 내가 소를 먹어 소가 아프다
넉넉한 풀밭도 없는 내가 먼데서 남의 일처럼
소를 먹어 소가 아프다
눈이 크고 양순한 짐승이 덩치만 커다래서
달라는 대로 목숨을 주고 갔다, 소의 자리에서
그윽이 바라본 적도 없는 내가, 풀 먹듯 소를 먹어
소가 아프다
소의 전부를 바라보는 눈길은 풀잎 같고
소의 부분을 탐하는 식욕은 사자와 같다
인간의 부식과 가축의 주식 사이에
못 넘을 산맥이 있다
못 넘을 산맥 너머에 돌림병이 돌면
인간은 재빨리 부식을 바꾼다
이제는 소 먹은 나, 스스로를 울어야 할 때
이 엄동, 태산처럼 죽어간 소들을 위해
소의 전부를 그윽이 다시 바라보아 줄 때, 이제는
스스로 살 수 없는 것들의 부자유를, 깊이 아파해 줄 때
손해를 계산하던 손길을 잠시 멈추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눈물로
이 엄동 내내, 쩌렁쩌렁 금이 가도록 푸르른 하늘
저 하늘 우러러야 할 때
설겅거리다
최서림
그의 말이 내 입 안에서 설익은 밥알 같이 설겅설겅 씹힌다 설겅거리는 그의 말을 맞대놓고 씹어대는 내 말이 내 입 안에서 설겅거린다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설익은 말들의 전쟁, 큰 말이 작은 말을 잡아먹는다 피가 흥건하다 비린내가 온몸 구석구석 파고든다 목향木香 이파리를 닦아줘도 비린내가 훅 끼쳐온다 아침부터 살강살강 씹히는 붉은 빛 햇살 때문에 백란白蘭은 하루종일 입 속이 개운치 않다 천리향千里香은 새삼 고슴도치 같이 웅크린 선인장이 가시로 공격해 올까봐 잔뜩 움츠리고 있다 겁먹은 눈도 가릴 겸 비린내도 내쫓을 겸 대극도는 넓은 잎으로 살랑살랑 부채질하고 있다 비린내는 부챗살 모양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약한 말을 집어삼킨 힘 센 말이 집 구석구석을 계엄군처럼 장악하고 있다
등
문정영
거울에 비친 등은 쓸쓸하다. 죽은 날벌레 같은 뾰루지 몇 개 달고 있다. 원형이 사라진 엉덩이와 뼈대가 보이는 척추를 따라 머리칼은 오래된 이력처럼 적을 것이 없다. 내내 앞의 눈치에 뒤를 열어두지 못한 사내의 모습이 거기 있다. 사랑은 앞에서 오는 것이라고, 뒤태를 소홀하게 대하더니 어느 하나 비추지 못한다. 귓속말처럼 등은 소소한 일을 처리하면서 많은 굴욕을 겪었다. 흔들리지 않고 버티는 중심이 생겼다. 쉽게 붉히는 얼굴을 가진 앞은 결핍성을 감추고 있다. 등은 스스로를 비추는 줄 모르고 비춘다. 등은 뒤돌아서도 등이다.
상추밭
권자미
상추밭에 앉아 풀을 뽑는다
맨발로 엉덩이를 끌며 호미질을 한다
할머니의 할머니 내 할머니의 할머니도 이곳에서
상추를 땄을 게다
사그락사그락 흙 갈라지는 소리, 사방에 가득하다
안방처럼 따스한 밭
이 평온은 어디서 오는가
보드라운 살결은 또 어디서
내 할머니들의 발꿈치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
땀방울 머리카락 눈꼽 닳은 손톱조각 그 사소한 것까지
밭 갈다 빠진 소의 긴 속눈썹 하나와 새참 먹다 고수레 던진 찬밥덩이까지
하다못해 소 부리던 내 할머니들의 영감 가래침과 잔소리까지도
흙이 되었다
밭 가운데 드러눕는다
흙이 내 볼을 비벼준다 안아준다, 친손親孫처럼.
상추가 손바닥을 펴서 손을 잡는다, 흔든다.
산삼 감정
김영서
장뇌 산삼 들고 와서 감정해달라고 한다
장뇌 산삼과 야생 산삼에 대하여 설명을 하는데
알아들으려 하지 않는다
사람을 닮았으면 인삼이고
산을 닮았으면 산삼인데
이것은 사람도 아니고 산도 아녀
하늘을 품으면 천종이고
땅을 닮으면 지종이고
사람을 닮으면 인종인데 이것은 산사람이여
밭 것이 산에서 살아가려니
사람이 그리워서 뇌두가 긴 것이여
뇌두로 나이를 계산하는 게 틀린 말은 아녀
최소한 그렇다는 얘기지
그리고 크다고 좋은 것은 아녀
격이 먼저지
좋은 산에서 크면 격이 높아지거든
신선처럼
알아듣겄냐
괘종시계가 두 번 우는밤
박승자
육이오 피난 때 어린 오빠를 잃은 어머니는
동그란 고리가 달린 새장을 늑골에 넣으셨다
새가 울음으로 늑골을 갉을 때마다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셨다
대나무 바늘이 지나간 자리마다 붉은 고리가 엮어졌다
빨간 스웨터를 짰다간 다시 풀어 짜시던 어머니
석유곤로 위에 올려진 양은냄비 뚜껑이 요란하게 날갯짓을 하면
구불구불한 생의 길이 한 줄기로 피어오르는 사이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라도 할 것처럼 털실은 부풀어 오르고
사막에서 불어온 붉은 먼지들이 방 한 구석으로 쏠려다녔다
괘종시계는 어느덧 자정을 넘어 두 번 울고
새장 안에 갇힌 새는 언제 날아가나요
꾸벅꾸벅 질문이 모이를 쪼듯 뜨개질의 속도는 점점 더 느려지고
괘종시계 속 밤의 무게는 눈꺼풀 위로 보풀보풀 쌓이는데
스웨터를 짜다 말고 열두 살 계집애 몸에 가늠해보던 어머니는
작구나, 마치 긴 밤을 자르듯 한 마디를 내뱉으시며
평생 우는 새를 늑골에서 꺼내지 않을 양
밤새 짰던 붉은 고리를 다시 풀고 계셨다
귀가 마르다니요
안태현
비가 잦아서 귀가 물러졌습니다
나는 달팽이관을 며칠 째 청소하는 중입니다
플라스틱 빗자루로 싹싹 쓸어낼 수 없으니
손톱이 긴 손가락으로
이물스런 말들을 꺼내 천변에 버립니다
다리 그늘 아래 돌덩이 몇 개 앉혀놓으면
왜 이곳에서 말이 환생할까
차가운 돌덩이를 깔고 앉아
사라지지 않는 말의 궤적에 대해 생각합니다
달리마 클럽의 사내들이 말줄임표를 찍으며 달려갑니다
바람을 가르는 자전거 두 바퀴가
묵음처럼 스쳐지나갑니다
그 말은 지극하여
다리를 건너 시장을 지나 어린이보호구역에 이르기까지
내 귀를 오래도록 열어두었습니다
사과를 쪼개다 손목이 비틀어져 내지르던 비명처럼
해는 뜨고
그 해가 따뜻하게 셔츠 뒤에 업혀오고
내 귀가 마르다니 참 다행입니다
부처꽃이 소곤소곤 피겠습니다
하루의 긴 그림자에
커다란 검은 보자기를 씌워 놓으면
새 귀들이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겠습니다
너무 놀라지 마라
김이듬
옥상에서 내가 떨어져도
구름 속에서 사람들이 떨어져도
지하실에 갇힌 사람들이 불에 타죽거나 물에 잠겨 죽거나 굶어죽어도
지하로 더 내려갈 수 있다
극과 극은 통하고 미지는 없다
너무 놀라지 마라
물수건에 죽은 벌이
검은 비닐봉지에 갓난애가
저 여자는 슈퍼에 가는 게 아니다
택시를 버스를 지하철을 타려면 강간을 각오해라
선뜻 지갑과 몸을 주고 목숨을 구걸하라
산책은 무슨 얼어 죽을
죽이나 먹어라
자빠져 자라
잠든 사이 축대가 무너지고
잠수정은 가라앉고
어린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선생이 제자를 죽이더라도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자살처럼
너무 흔해빠진 뉴스지
위에선 더 큰 일이 벌어지고 있잖니
그들이 초고속열차를 개통했다
달아나라
정차하지 않는 그 기차를 타고
기차 끝에서 끝으로 달음질쳐봐라
성실히
그래봤자
식판을 들고 줄을 서라
밥은 굶어도 꼭 먹어야 한다
수면제외 진통제 환각제, 아무튼 약을 입에서 떼지 마라
머리 위 선반에도 없다
네가 낳은 앤 벌써 네가 먹었잖니
얘야, 너무 놀라지 마라
내일은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다
보라, 네 식욕은 상상력은 아무 것도 아니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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