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 토마스 베른하르트, 현암사, 2008(초판 발행)
나는 죽음이 언제나 내 목을 조르는 것을 느낀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죽음은 나를 따라다닌다.
- 몽테뉴
독일어 단어는 납덩이처럼 매달려 있으면서 정신을 내리눌러 해롭지요, 하고 감베티에게 말했다. 독일어로 사고하면 독일어로 말할 때처럼, 표현하기도 전에 생각한 것을 억누르는 독일어의 비인간적 중량에 눌려 마비되고 말지요.
짐을 꾸리고 나면 늘 그렇듯, 가방을 들어보니 너무 무거웠다.
전형적인 대륙 사람이면서 영국인보다 더 영국식으로 차려 입었지만, 그 모습이 세련되거나 고상하지 않고 오히려 그로테스크해 보였다.
좋아하는 도시에는 언제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지,
예컨대 카페에서 후버 씨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후버 박사를 만나는 것이며, 마이어 씨와 식사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석사 엔지니어 마이어 씨와 식사하러 가는 것이다. 인간이 아니라 석사 엔지니어가 될 경우, 단순히 뮐러 여사가 아니라 변호사 뮐러 씨의 부인이 될 경우 비로소 그들은 목표를 달성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매사 실망만 하면서 살아온 아버지의 생김새를 재산 물려받듯이 닮아 갔던 것이다.
어머니는 딸들에게 언제나 인형처럼 옷을 입혔다. 딸들을 언제나 인형 다루듯 하고 다름 아닌 인형으로 보았다. 수많은 어머니들이 그렇듯이 어머니도 처음부터 딸을 인형으로 취급했는데, 어머니가 딸들을 사람 아닌 인형으로 낳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왜 사진 찍는 사람들은 사진으로나마 행복해 보이려 할까, 아무튼 왜 실제만큼 그렇게 불행해 보이지 않으려 할까, 하고 나는 생각해본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모습으로 찍히려 하지 절대 불행한 모습으로 찍히려 하지 않지요,
마음속으로 벌써 정해 놓은 단 한 가지는 보고서의 제목을 소멸이라 하기로 했다는 겁니다. 내가 쓰고자 하는 보고서는 보고서에 기록된 것, 즉 내가 볼프스엑으로 이해하고 있는 모든 것, 볼프스엑을 의미하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지요, 감베티 씨.
우리는 모두 볼프스엑 같은 것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우리 자신을 위해 그것을 소멸시키기를 원하며, 그것을 기록하고 없애 버림으로써 소멸시키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보통 우리는 그렇게 소멸시킬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때가 온 것 같아요, 내가 그럴 나이가 된 거지요, 하고 나는 감베티에게 말했다.
우리의 평생 주제인 이것에 대해 그토록 수없이 많은 메모를 해 두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실제로 우리가 도대체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평생 동안 우리를 결정하는 것에 대해 아주 긴 보고서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분량의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본래부터 나는 어떤 장면이건 곧바로 무대에 등장하는, 지체 없이 곧바로 무대에 등장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이 못 된다,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주저하면서 일단 유리한 관찰 지점으로 물러서는 것이 나의 방식이다. 내 적성엔 이렇게 간접적인 것이 더 어울린다.
솔직히 인정하면, 파리로, 런던과 로마로 두루 세계를 여행한 결과가 바로 이토록 경직된 지금의 내 모습이며, 학문을 연구하고, 내 생각으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오하게 인간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다는 결과가 정원사들과 악수를 나누고 몇 마디 인사말조차 건네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한 내 모습이다.
이 시대에 존재하는 자는 모두 이 시대의 주주들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언젠가 그녀는 나더러 억지 철학을 하는 사람이며, 정신에 대해 죄를 짓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제 어린 시절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은 없으니까, 하고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세기의 전환기에 이르면 사유하는 것으로, 사유하는 것을 통해 존재해 온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며, 사유하는 인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는 단 한 가지,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자살하라는 것입니다, 감베티 씨.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안 - 2011 봄 (0) | 2011.05.08 |
---|---|
BECK 5권 - Harold Sakuishi (0) | 2011.04.28 |
내셔널 지오그래픽 코리아 - 2011년 4월 (0) | 2011.04.23 |
커팅엣지 애드버타이징 - 짐 에이치슨 (0) | 2011.04.21 |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가치에 대한 탐구) - 로버트 M. 피어시그 (0) | 2011.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