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가치에 대한 탐구, 로버트M. 피어시그, 문학과지성사, 2011(제1판 제3쇄)
우리에게 즐거운 시간을 재는 척도란 ‘시간’보다는 ‘즐거운’에 역점이 맞춰진 것이다.
“무엇이 새로운가?”는 흥미롭고도 시야를 넓혀주는 불멸의 질문이기는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배타적인 입장에서 추구하는 경우 다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련의 지엽적이고 하찮은 것들 것 유행들, 이를테면 내일의 침전물밖에 쌓이지 않는다.
폭보다는 깊이와 관련되는 질문, 또한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인해 침전물을 아래쪽으로 쓸어버릴 수 있는 질문인 “무엇이 최선인가?”에 대해 나는 관심을 갖고자 한다.
그는 사물의 의미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의 존재 자체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다.
위로의 말은 친족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낯선 사람들을 위한 것, 병원을 위한 것이다. 마음의 상처에 붙이는 자그마한 정서적 반창고와 같은 것인 위로의 말은 크리스가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고 찾는 것도 아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경우, 당신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다만 그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당신의 믿음을 재확인케 하는 그런 면모뿐일 것이다. 이는 결코 그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 당신은 그가 본 것을 보아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체계, 실재하는 체계는 다름 아닌 현재 우리가 구축해놓은 체계적 사유 그 자체이고, 합리성 그 자체다. 아울러, 공장을 때려 부수더라도 그 공장을 세운 이 합리성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합리성은 또 하나의 공장을 세울 뿐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이다. 만일 혁명 봉기를 통해 체계적 정부를 전복하면서도 그 정부를 낳은 체계적 사유 패턴을 건드리지 않은 채 그대로 두면, 그런 패턴은 이어지는 정부에서 되풀이될 것이다. 체계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도 무성하지만, 이에 대한 이해는 너무도 빈약하다.
모터사이클이란 바로 그런 것일 뿐이다. 말하자면, 강철 작업을 통해 구체화된 개념 체계다. 모터사이클의 어떤 부분도, 어떤 형태도, 누군가의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라고는 없다.
내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강철을 가지고 작업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다음 사실을 깨닫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즉, 모터사이클이란 일차적으로 정신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금속이라고 하면 무엇이든 이미 정해진 형상을 연상한다.
내가 정말로 마음에 두고 있는 것 – 예컨대, 모터사이클은 매 순간 연속성을 유지한다는 식의 선험적 추정 – 에 관해 이렇게 저렇게 입이라도 열면, 그것도 야외 강연과 같은 총체적 지식 전달 체계의 도움을 받지 않은 채 이에 관해 지껄이기라도 하면, 그들은 그저 깜짝 놀랄 것이고 무엇이 잘못되었나 어리둥절해할 것이다. 이 같은 연속성에, 또한 이 같은 연속성에 대해 우리가 말하거나 생각하는 방식에, 나는 정말로 흥미를 느끼고 있으며, 그래서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평소의 점심 식사 자리에서도 사람들과 거리를 두곤 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그들에게 소원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갖는다. 이것이 문제다.
그는 교리敎理의 측면에서 볼 때 힌두교와 불교와 도교 사이의 차이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와 유대교 사이의 차이만큼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힌두교와 불교와 도교는 교리상의 차이 때문에 서로 성전을 벌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에 대한 언어적 진술을 결코 현실 그 자체로 생각하지 않기때문이다.
동양의 모든 종교에서 지고의 가치는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 즉,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라는 산스크리트어의 교리에 놓인다.
전기 바비큐 기구 조립은 사실 오래전에 잃어버린 조각 예술의 한 분야입니다. 수 세기 동안의 잘못된 지적 경향으로 인해 뿌리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결별이 이루어져, 이제는 양자 사이를 관련지으려는 시도조차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지요.
우리는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어요. 우리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고 혼란스럽다고 느끼는 이유는 옛날의 사유 방식이 새로운 경향을 다루는 데 부적절하기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규범적 수사학이란 “학생들의 글에 나오는 수식 어구의 의미상 주어와 주문장의 주어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면 가벼운 질책을 가함”과 같은 말에서 확인되는 낡은 규칙들을 말한다. 철자가 맞아야 하고, 구두점을 맞게 찍어야 하고, 문법적으로 틀림이 없어야 한다는 식의 규칙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쪼잔한 사람들을 위한 쪼잔한 규칙들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런 규칙들을 다 기억하면서 그와 동시에 자신이 쓰고자 애쓰는 글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규칙이란 친절한 마음이나 예의 의식 또는 자애로운 마음에서 싹튼 것이 아니라 원래 신사와 숙녀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이기적 욕망에서 비롯된 식사 예절과도 같은 것일 뿐이다.
학교가 학생들에게 모방을 교육하는 주체인 것이다. 선생이 원하는 것을 학생이 모방하지 않으면 학생은 형편없는 성적을 받게 된다. 이곳 대학에서는 물론 한결 더 복잡하다. 학생들은 선생을 모방하되 선생을 모방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강의의 핵심을 취하고 있지만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을 다루고 있다는 확신을, 선생의 마음에 심어주는 방식으로 모방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A를 받게 될 것이다. 한편, 독창성을 발휘하다 보면, A에서F에 이르기까지 어떤 성적을 받게 될지 모른다.
학위 및 학점 제도를 철폐해야 한다는 파이드로스의 주장을 처음 접했을 때 몇몇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학생들이 당황하거나 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우선적인 판단으로는 총체적인 대학 체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한 학생이 완전히 솔직한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그녀의 말은 바로 이런 판단을 백일하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물론 학위 및 학점 제도를 선생님께서 없앨 수는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대학에 온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닌가요?”
그 학생의 가장 큰 문제는 수년 동안 이어져온 당근과 채찍 식의 학점 제도로 인해 그의 마음에 굳건히 자리를 잡게 된 노예 근성이다. “당신이 채찍질을 하지 않으면, 나는 일을 안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고집쟁이 노새의 정신 태도가 그 학생의 문제인 것이다.
그는 더 이상 학점 때문에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그는 지식 때문에 학교에 다니는 사람일 수도 있다.
즉, 그는 총명하고 진지한 학생일수록 강의의 주제에 더 흥미를 갖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학점에 대한 욕구가 거의 없을 것이고, 둔하고 게으른 학생일수록 학점이 그럭저럭 잘해나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표식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학점에 대한 욕구가 누구보다도 더 강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학점은 교육의 실패를 은폐한다. 형편없는 선생은 학생들의 마음속에 기억될 만한 것을 전혀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은 채 한 학기 전체를 때워나갈 수 있다. 그리고 적절치 않은 시험을 학생들에게 보게 해서 적당히 성적을 부여하고, 그럼으로써 어떤 학생들에게는 무언가 배운 듯한 인상을 남겨줄 수 있다.
당신이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더 이상 미리 생각하지 않게 되었을 때, 발걸음 하나하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기를 멈추고, 그 자체로서 독자적 의미를 지닌 사건이 된다.
무언가 미래의 목적만을 위해 사는 삶이란 피상적인 삶일 수밖에 없다.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산비탈들이지 산꼭대기가 아니다. 바로 여기가 만물이 성장하는 곳이다.
하지만 물론 꼭대기가 없으면 비탈도 있을 수 없다. 비탈의 상태와 각도를 정하는 것이 꼭대기인 셈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른다.
어린아이들은 “그냥 자기네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훈련을 받는다. 하지만… 하지만 무엇을 하도록 훈련을 받는가…. 그렇다!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도록 훈련을 받는다. 부모, 선생, 지도 교사, 경찰, 법관, 관리, 왕, 독재자가 바로 그들이다.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경멸하도록 훈련을 받게 되면, 당신은 바로 그 남들의 하인, 한결 더 순종적인 하인이 된다. 요컨대, 성실한 노예가 되는 것이다.
마침내 그는 질이 주체든 객체든 이들과 독자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을, 오로지 주체와 객체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을 때에만 질이 확인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주체와 객체가 만나는 바로 그 지점이다.
온기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질은 사물이 아니다. 이는 사건이다.
한결 더 온기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질은 주체가 객체를 인식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리고 객체가 없다면 주체도 있을 수 없기 때문-다시 말해, 객체는 주체의 자기 인식을 유발하기 때문-에, 질이란 주체와 객에 양자 모두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사건이다.
이는 열기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선은 산의 정상이 아닌 “계곡의 정신”이다.
나사는 너무도 싸고 사소할 뿐만 아니라 단순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이제, 질에 대한 당신의 인식이 강화됨에 따라, 당신은 이 하나의 개별적이고도 특정한 나사가 싼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 순간부터 이 나사는 모터사이클 전체의 판매 가격만큼이나 값이 나가는 소중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 나사를 제대로 빼내지 않으면 모터사이클은 실제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나사에 대한 이 같은 재평가가 이루어짐에 따라, 당신은 이에 대한 당신의 지식을 기꺼이 확장하고자 할 것이다.
종잡을 수 없는 욕망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은 채 아무런 욕망도 없이 그저 자신의 삶의 행위를 묵묵히 이어나갈 뿐인 상태를 지시하는 가치론적 평정, 이는 가장 성취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기계 수리 작업을 할 때는 어떤 경우에도 자존심은 상처를 받게 마련이다.
기계는 당신의 인격에 반응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기계가 당신의 인격에 반응하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기계가 반응하는 인격은 당신의 진정한 인격이다. 즉, 당신의 자존심이 당신의 마음속에 심어준 그릇되고 과장된 당신의 이미지들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느끼고 추론하고 행동하는 당신의 진정한 인격에 반응한다.
당신 스스로가 실수를 하게 되면, 적어도 당신은 무언가를 배우는 혜택을 누리게 된다.
초조는 권태와 가까운 것이지만, 항상 한 갖지 요인에서 비롯된다. 즉, 일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의 양을 과소평가하는 데서 비롯된다.
당신이 무언가를 알게 되면, 자극 요인으로서의 질이 당신을 부추길 것이고, 그러면 당신은 그 자극 요인에 대해 정의하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정의하고자 할 때 당신이 동원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당신이 알고 있는 것뿐이다. 따라서 당신의 정의는 당신이 알고 있는 것들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어떤 정의를 내리든 이는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유추類推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사람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외로움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심리적 거리로, 몬테나 주와 아이다호 주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대단하지만 심리적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일차적 차원의 미국은 고속도로와 제트기 여행과 텔레비전과 초대형 영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게 살아가는 그들의 마음에 그들 주변을 직접 둘러싸고 있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심어준 것은 다름 아닌 대중 매체들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믿음 때문에 그들은 외로운 것이다.
세계를 좀더 나은 것으로 개선하는 일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개개인이 질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세상,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의 전부다.
변증법, 그것이 한 역할은 권좌 찬탈자다. 그가 감지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완력을 이용하여 그 모든 선善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을 침범하고 이를 자기 세력권에 넣어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벼락출세자-이것이 바로 변증법이다.
그는 어디서 총알이 날아왔는지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이제까지 한 번도 살아 숨 쉬는 소피스트와 마주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죽어 있는 소피스트들과 만났을 뿐.
그가 판단하기에 질이란 여기 이곳-연기에 그을린 창문과도 같은 말言들과 대양처럼 넘치는 말들에 가려 흐릿해진 바로 이곳-에서보다는 저 위쪽 수목한계선에서 더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미 대륙의 절반에 해당하는 거리를 가로질러 우리를 이곳까지 운반해온 엔진이 계속해서 윙윙 소리를 내고 있다. 자기 자신의 내적인 힘 이외에는 모든 것을 줄기차게 잊은 채.
그들은 미래란 우리의 등 뒤쪽에서 다가오는 그 무엇으로 보았다. 그리고 과거란 우리의 눈앞에서 멀어져가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해 생각을 해보는 경우, 우리는 이 같은 시각이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것보다 더 정확한 시간에 대한 비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미래를 정면에서 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떤 종류의 미래가 내 뒤에서 나를 향해 다가올지 나는 정말로 모른다. 하짐나 과거는, 눈앞에 펼쳐져 있는 과거는 내 시야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한다.
되묻고 다시 되묻는 일은 결국 “그가 어디로 간 것일까?”를 묻기 전에 “가버린 ‘그’의 정체는 무엇인가?”의 물음이 먼저 제기되어야 한다는 깨달음과 함께 중단되었다.
크리스의 피와 살을 이루던 물질은 물론 산화된 다음 화장장의 굴뚝을 따라 올라가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이 크리스는 아니다.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면, 내가 그처럼 몹시도 그리워하는 크리스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패턴이라는 점, 비록 그 패턴 안에는 크리스의 피와 살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이 패턴에 포함되어야 할 전부는 아니라는 점이다.
아마도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묘지의 비석과 망자의 물질적 소유물이나 망자를 나타내는 그 무엇에 그처럼 애착심을 느끼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이는 패턴이 무언가 새로운 물질적 대상을 찾아 그 중심에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치 아내가 나한테서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고,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우리가 발사 직후의 로켓을 담은 사진 속의 로켓이 된 것과도 같은 느낌이 엄습했던 것이다.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셔널 지오그래픽 코리아 - 2011년 4월 (0) | 2011.04.23 |
---|---|
커팅엣지 애드버타이징 - 짐 에이치슨 (0) | 2011.04.21 |
내셔널 지오그래픽 코리아 - 201103 (0) | 2011.03.19 |
대한민국 원주민 - 최규석 (0) | 2011.03.19 |
시간의 부드러운 손 - 김광규 (0) | 2011.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