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부드러운 손, 김광규, 문학과지성사, 2008(초판4쇄)
춘추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
한 줄 쓴 다음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
병술년 봄을 보냈다
힐끗 들여다본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다
물난리에 온 나라 시달리고
한 달 가까이 열대야 지새며 기나긴
여름 보내고 어느새
가을이 깊어갈 무렵
겨우 한 줄 더 보탰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가을 겨울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고 난 뒤
땅에 떨어져 나뒹구는 후박나무 잎
누렇게 바래고 쪼그라든 잎사귀
옴폭하게 오그라진 갈잎 손바닥에
한 숟가락 빗물이 고였습니다
조그만 물거울에 비치는 세상
낙엽의 어머니 후박나무 옆에
내 얼굴과 우리 집 담벼락
구름과 해와 하늘이 비칩니다
지천으로 굴러다니는 갈잎들 적시며
땅으로 돌아가는 어쩌면 마지막
빗물이 잠시 머물러
조그만 가을 거울에
온 생애를 담고 있습니다
이른 봄
초등학생처럼 앳된 얼굴
다리 가느다란 여중생이
유진상가 의복 수선 코너에서
엉덩이에 짝 달라붙게
청바지를 고쳐 입었다
그리고 무릎이 나올 듯 말 듯
교복치마를 짧게 줄여달란다
그렇다
몸이다
마음은 혼자 싹트지 못한다
몸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해마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봄꽃들 피어난다
어느 날
오래 써온 수첩이었다
가족들의 음력 생일과
전셋집 옮겨다닌 날짜
친지들의 주소와 전화번호
은행계좌와 신용카드 번호 따위가
깨달같이 적혀 있는 수첩이었다
십 년 넘게 지니고 다녀
모서리가 하얗게 해진
이 가죽수첩이 갑자기 자취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렇게
평생 간직해온 수첩이나 주소록을
잃어버리는 날이 온다
신경질을 부려도 허망한
기억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렇게
잃어버리며 그리고 잊어버리며
한 생애의 후반기가 시작된다
높아지는 설악산
천불동 계곡을 거쳐
귀면암 양폭을 지나서
대청봉에 올라갔었지 옛날에는
오세암까지 하루에 갔다 오기도 했어
요즘은 기껏해야 비선대에서
송사리 떼 환하게 보이는 차가운 물에
발 담그고 앉았다가
돌아오는 것이 고작이야
울산바위에 올라가본 지도 오래되었군
요즘은 내원암을 거쳐서
계조암 흔들바위까지 가서
칡차나 한 잔 마시고
돌아오는 것이 고작이야
세존봉과 마등령을 타는 등산로는
이제 전설이 되어버렸어
설악산이 점점 높아지고
세상이 자꾸만 좁아지는 거야
동네 골목길도 차츰 짧아지더니
손바닥만 한 마당으로 줄어들고
잠자는 방 한 칸으로 좁아지고
마침내 몸뚱이 하나 겨우 들어갈
흙구덩이만 남고 말겠군
그래도 갑갑한 줄 모르니
땅속이 물속보다 깊은가 봐
멀미
서울에서 프랑크푸르트로 날아가는
국제선 이코노미 클래스 칸에서
국적 없이 날아다니는
파리 한 마리
비행기를 타고 유라시아를 넘나드는
파리 한 마리가
기내식 냄새를 맡고
비즈니스 클래스 칸으로 날아간다
널찍한 이등칸과 비좁은 삼등칸을 거리낌없이
오고 가는 파리 한 마리
좌석벨트를 조여 매고 앉아서 나는
광활한 구름 벌판을 내려다본다
고도 10,000미터 상공을 함께
날아가고 있는 파리와 나의
돌연한 공존이 떠오른다
참을 수 없는 메스꺼움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효자손
우체국 앞 가로수 곁에
아낙네가 죽제품 좌판을
벌여놓았다 대나무로 만든
광주리와 키와 죽침 따위에 섞여
효자손도 눈에 띄었다 건널목
신호등이 황급하게 깜빡이지 않았더라면
그 조그만 대나무 등긁이를 하나
사왔을지도 모른다
노인성 소양증만 남고
물기 말라버려 가려운 등을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장난 삼아
간질간질 긁어주던
고사리 같은 손
이 작은 효자손이 어느새 자라서 군대를 갔다
옆에는 나직한 숨결마저 빈자리
어둔 창밖으로 누군가 지나가며
빨리 떠나라고
핸드폰 거는 소리
뒤에서 슬며시 등을 떠미는 듯
보이지 않는 손
벽오동 잎보다 훨씬
커다란 손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부드러운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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