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헤르타 뮐러, 문학동네, 2010(13)

 

 

 

 

 

 나는 뒹구는 돌에도 눈이 달린, 골무 같은 소도시를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소리 없는 짐을 들고 다닌다. 나는 나를 너무나 깊이, 그리고 너무나 오래 침묵 안에 싸두었던 탓에 어떤 말로도 나라는 짐을 꺼내놓을 수 없었다. 말을 한다는 것은 나를 단지 다른 식으로 포장하는 것에 불과했다.

 

 

 

 세상이 가면무도회장도 아니거니와 한겨울에 러시아로 가야 하는 사람은 뭘 입어도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다.

 

 

 

 배가 고프다는 것 말고는 자신에 대해 할 말이 없다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까. 배가 고프다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면, 입천장이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와 두개골에 닿을 지경이면 천장이 둥근 교회처럼 조그만 소리도 크게 울린다. 배고픔을 더는 견딜 수 없을 때면 입천장이 당긴다.

 

 

 

 나는 지금까지도 배고픔을 상대로, 내가 그로부터 벗어났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더는 굶주리지 않아도 되었을 때부터 나는 글자 그대로 삶 자체를 먹는다. 먹을 때면 음식의 맛에 포위된다. 수용소에서 돌아온 이후로 육십 년 동안, 나는 굶주림에 대항해 먹는다.

 

 

 

 사람들은 명령에 휘둘리고, 뭔가를 시작하고, 쫓겨난다. 따귀를 맞고, 발길질을 당한다. 속은 완고하며 우울해지고, 겉은 개처럼 비굴하며 비열해진다.

 

 

 

 나는 조용한 입속말로 내게 그 글귀를 선물했다. 잇새에서 시멘트가 버석거리고, 말은 금방 부서졌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더러운 몸을 그대로 침대에 누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열쇠가 필요 없는 호텔이군. 프런트도 없고, 벽을 툭 터놓고 사네, 스웨덴처럼. 막사와 트렁크는 항상 열려 있다. 내 귀중품은 설탕과 소금이다. 베개 밑에 먹다가 아껴둔 딱딱한 빵이 있다. 빵은 내 귀중한 재산이고 알아서 자기를 지킨다. 나는 스웨덴의 어린 송아지다. 송아지는 호텔 방에 돌아오면 매일 똑 같은 짓을 한다. 맨 먼저 베개를 들쳐, 그 밑에 빵이 있는지 확인한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건 언제나 운 좋은 일이었다.

 첫째, 차를 타고 가는 동안은 아직 도착한 게 아니다. 도착하지 않은 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차를 타고 가는 시간은 금렵기(禁獵期)였다.

 

 

 

 10월 말에 벌써 얼음못이 박힌 진눈깨비가 내렸다.

 

 

 

 우리는 그날 밤 총살을 당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모인 사람들 중 되도록 앞 차례가 되고자 앞줄로 파고들었다. 죽기 전에 시체를 트럭에 싣는 일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수프는 발끝까지 몸을 덥혀주었다. 콧물이 떨어졌다. 아바슈이, 잠깐만, 러시아 여인은 그렇게 말하고 옆방에서 눈처럼 새하얀 손수건을 가져왔다. 그녀가 손수건을 내 손에 올려놓고는 가져도 좋다는 의미로 그대로 내 손을 감싸주었다. 그녀가 내게 손수건을 선물했다. 나는 그것으로 코를 풀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일은 방문판매라는 거래와 나와 그녀와 손수건을 넘어서는 무엇이었다. 그녀의 아들이 관련된 일이었다. 나는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그녀나 나 혹은 우리 둘이 너무 멀리 나아가버렸다. 그녀는 아들을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기 있는 사람은 나이고, 아들은 나처럼 집을 떠나 먼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거기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게, 내가 그녀의 아들이 아니라는 게 고통스러웠다. 그녀 역시 고통을 느꼈고, 어떻게든 거기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지 않으면 아들에 대한 근심을 주체할 수 없을 테니까. 나 역시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되는 것, 두 명의 강제추방자가 되는 것이 내게는 너무 버거웠다 그건 동그란 의자 위에 나란히 앉은 두 마리의 닭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나는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짐스러웠다.

 석탄을 쌌던 보자기는 거칠고 더러웠다. 나중에 거리로 나와 손수건 대신 보자기를 썼다. 코를 풀고 나서 목에 둘렀다. 그러면 목도리가 되었다. 걸어가면서 목도리 끝자락으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잠깐씩만 눈을 닦았다. 볼 사람은 없었지만 나 자신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울 이유를 너무 많이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속 다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심장삽은 삽머리가 반들반들해지고 손바닥에 용접 자국이 흉터처럼 박힐 때까지 길이 들어야 한다. 삽 전체가 내 몸 밖 또 하나의 중심이 될 때까지.

 

 

 

 배고픔은 항상 있다.

 늘 거기 있으므로 제가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온다.

 이 인과법칙은 배고픈 천사의 손에서 탄생한 졸작이다.

 배고픈 천사는 일단 나타나면 본때를 보인다.

 정확도는 높다.

 삽질1= 1그램

 

 

 

 배고픈 천사는 입 안에, 내 입천장에 오롯이 매달린다. 그건 배고픈 천사의 저울이다.

 

 

 

 배고픈 천사가 내 뺨을 그의 턱 위에 끼워 맞춘다. 그리고 내 숨결을 그네 뛰게 한다. 숨그네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심한 착란 상태이다. 눈을 올려 뜨면 저 위로 조용한 여름솜, 구름의 뜨개질. 내 뇌는 바늘 끝에 꿰여 하늘에 고정된 채 꿈틀거린다.

 

 

 

 무리지어 나를 따라오는 것들이 숲에 지나지 않음을, 그 안에서 느끼는 고독은 산책일 뿐임을, 솔방울은 상기시켜준다.

 

 

 

 말이 없어지면, 원치 않아도 절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잘 닫히지 않는 서랍처럼 저마다 향수(鄕愁)를 안으로 밀어넣는다.

 

 

 

 배고픔은 떠난 적이 없는데도 다시 찾아온다. 외로움도 그렇다.

 

 

 

 금방 찍어낸 슬래그벽돌은 무게가 10킬로그램인데다 젖은 모래처럼 부서지기 쉬웠다.

 

 

 

 어두운 지하실에서는 우수에 찬 사람처럼 조심스럽되 결단력이 있다.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닌 듯한데 지하실에 있다보니 지하실을 닮아가나보다.

 

 

 

 이제 날도 풀리니까 먹을 게 없으면 주린 배에 볕이라도 쬘 수 있겠구나.

 

 

 

 하얀 두건을 쓴 달이 간호사처럼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제 감자 따위는 소용없을지도 몰랐다. 지하실에 있을 때 이미 죽을 병에 걸렸는지도 몰랐다. 나무에 앉은 새들이 이따금 목메어 울고, 멀리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밤의 실루엣들은 물처럼 흘러갔다. 두려워해서는 안 돼, 나는 생각했다. 아니면 빠져 죽을지도 몰라. 기도를 하지 않으려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불변하는 것들은 저 자신을 소모하지 않는다. 세상과 영원히 똑같은 관계를 지속할 뿐이다. 세상과 스텝의 관계는 매복이고, 세상과 달의 관계는 밝힘이며, 들개는 도주, 풀은 흔들림이다. 세상과 나의 관계는 먹는 것이다.

 

 

 

 헤르만 아저씨는 나중에 왔다. 나는 루이야 아주머니 앞에서 언덕을 굴러 내려왔다. 언덕을 뒹굴 때 하늘은 아래로 내려오고 땅은 위로 올라갔다. 내가 하늘로 떨어지지 않게 발을 붙잡아주는 것은 언제나 풀이었다.

 

 

 

 나는 양동이에서 적당한 무연탄 세 덩어리를 고른다. 하얀 토끼에서 노란 토끼가 튀어나오듯 불꽃이 튄다. 그다음에는 노란 토끼에서 하얀 토끼가 튀어나온다. 토끼들은 서로 갈기갈기 물어뜯으며 두 화음으로 휘파람을 분다.

 

 

 

 향수가 찾아오면 마른 눈으로 맞았다. 향수가 주인 없이 떠돌게도 했다.

 

 

 

 오래된 부부는 공복을 느끼게 하지, 외도는 허기를 달래주고.

 

 

 

 가격표는 밟기 전에 주의하라는 푯말처럼 보였다.

 

 

 

 새벽에 몸을 씻고 머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한 방울의 시간처럼 코를 따라 입으로 흘러내렸다.

 

 

 

 수용소는 머릿속에서 자신을 확대시킬 거리를 확보하려고 나를 집으로 보냈다. 고향에 돌아온 후로 내 보물에는 나 거기 있다는 물론 나 거기 있었다라는 말도 적혀 있지 않다. 내 보물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 왼쪽 관자놀이에서 오른쪽 관자놀이로 수용소가 차차 뻗어나간다. 그러므로 나는 내 해골 전체가 커다란 부지라고, 수용소 부지라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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