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좌파 세번째이야기, 김규항, 리더스하우스, 2010(초판1)

 

 

 

 

 보수적인 부모는 당당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내몰고,

 진보적인 부모는 불편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는다.

 보수적인 부모는 아이가 일류대 학생이 되길 소망하고,

 진보적인 부모는 아이가 진보적인 일류대 학생이 되길 소망한다.

 

 

 

 나는 글의 소재를 얻기 위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글을 쓴다.

 

 

 

 글을 씀으로써 내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비로소 내 생각으로 정리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다시 내 일상의 에피소드에 전적으로 반영된다.

 

 

 

 직함은 본디 그 사람의 직업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직업이 아니라 신분을 나타낸다. 그것은 모든 직업에 직함을 붙여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누구나 변호사나 교수를 ‘아무개 변호사님’, ‘아무개 교수님’이라고 부르지만, 누구도 환경미화원이나 농민을 ‘아무개 환경미화원님’, ‘아무개 농부님’이라 부르지 않는다.

 

 

 

 법정이 아니라면 굳이 변호사님이라 부를 이유가 없으며 학교가 아니라면 굳이 교수님이라 부를 이유가 없다.

 

 

 

 인민이 제 고단한 삶의 원인을 지배 세력에게서 찾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민을 인종이나 종교, 지역 따위로 쪼개어 서로 적대하게 만드는 건 고전적인 지배 수법의 하나다. 지역 문제는 보수 정치 세력끼리의 연대(혹은 결과적 연대)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수익은 시차를 두고 분배된 것이다.

 

 

 

 이제껏 해온 강연 가운데 가장 불쾌했던 기억은 오래전 한 공중파 텔레비전의 PD들 강연. 겉으로 큰 문제는 없었는데 그들에겐 세상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태도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건 주요 일간지의 기자나 공중파의 기자와 시사 쪽 PD들의 일반적인 경향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른바 주류 사회 핵심부의 고급 정보에 접근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세상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다는 착각에 깊이 빠져 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알량한 힘으로 ‘조질 것’을 고르다 보면 완장을 찬 무뢰한처럼 빠르게 자의식이 파괴되어간다.

 

 

 

 아이들은 아직은 순수하게 대화하기 때문에, 이를테면 <100분 토론>에 나오는 중년 남성들처럼 대화를 그저 ‘자기 말할 차례를 기다리는 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대화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거의 없다.

 

 

 

 어른들도 아이들만큼 많이 실수하고 잘못한다. 그런 실수나 잘못을 모조리 아이에게 자복할 순 없지만 적어도 아이가 알아챈 실수나 잘못은 바로 사과해야 한다. 바로 사과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제아무리 너그러운 가르침도 너그러운 권위주의에 머물게 된다.

 

 

 

 다들 학교나 교사에 대해 말하지만, 그렇다고 학부모들이 일방적인 피해자인 건 아니다 아이를 인간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일에 미쳐 있는 신자유주의 시절의 학부모들은 대체로 교사 욕을 할 처지가 못 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교사 앞에서 온갖 알랑방귀를 뛰어대다가 뭔가 수틀리면 교사는 아예 상대 안 하고 곧바로 교장이나 교육청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이면 저마다 열혈지사가 되어 교사와 학교를 성토하지만 남의 아이까지 포함한 문제에 연대하는 일엔 하나같이 꼬리를 빼는 사람들이다.

 

 

 

 후배가 제 동무들과 인도 여행을 하다가 그곳 청년들과 며칠 동행했다. 서로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는데 그들의 영어 발음이 영 ‘안 좋’더란다. 후배 패거리는 짐짓 우쭐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헤어지는 날 인도 청년들이 빈정거리듯 말하더란다. “너희 나라, 아직 독립 안 했냐?

 

 

 

 영어 공부는, 다른 모든 공부가 그렇듯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건 그게 미국 말이라서가 아니라 오늘 실제적인 국제 공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어 발음이 미국 사람들과 얼마나 비슷한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문장은 제대로되 발음만은 (알아들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제 나라 식으로 하는 게 훨씬 더 온당하고 품위 있다.

 

 

 

 중학생쯤 되는 아이들이 있는 집에 가보면 오늘 아이들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사춘기의 반항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타자에 대한 예의나 배려가 없고 소통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짜증스럽고 종종 공격적이다. 부모들은 별 도리가 없다. 오늘 한국의 부모와 자식은 엘리트 체육에서 선수와 코치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선수의 성적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코치들은 선수의 인간적 면모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부모들은 아이에게 좋은 아동문학을 읽히되 그 안에 담긴 가치가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도록 갖은 노력을 다 한다. 권정생이나 박기범의 책은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책에 담긴 가치대로 사는 건 반대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아동문학에 담긴 가치나 감동이 실제 삶과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거나 상업적으로 사용되기만 하는 거라면 우리가 아동문학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건 매우 무망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런 진실을 뭉뚱그려 일본 민족 전체에 대한 반감으로 만든 건 해방 후 여전히 한국을 지배한 일제 부역세력이다. 그 후 반세기 동안 그들은 실제로는 일본 극우세력과 철저히 야합하면서도, 대중들에겐 일본인 전체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감을 심어줌으로써 제 정통성 문제를 은폐해왔다. 결국 대개의 한국인들은 젊은이들의 음악이나 옷차림 따위에 나타나는 왜색에 대해선 나라가 망할 것처럼 개탄하면서도 종군 위안부 문제처럼 정작 자존과 위엄을 보여야 할 문제엔 별 무관심한, 희한한 태도를 갖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대개 ‘윤리적 타락’이라는 면에서 해석되곤 한다. 교회가 개혁되면 해결된다는 이야기다. 나는 교회 개혁운동의 열정을 진심으로 존중하지만 그 운동이 한국 교회들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 대개의 한국 교회들은 ‘타락한 교회’가 아니라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행여 발끈할 건 없다. 나는 이치에 맞는 비판은 ‘인간의 생각’이라 방어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제 생각은 ‘하느님의 뜻’이라 강변하는 사람들과 핏대 올릴 생각은 전혀 없으니 말이다.

 

 

 

 예수와 예루살렘 성전 체제와의 충돌은 결국 두 하느님의 충돌이었다. 새로운 하느님, 엄마 하느님은 인민에겐 후천 세상이 왔음을 알리는 복음이었지만 옛 하느님을 섬기며 온갖 영화를 누리던 자들에겐 끔찍한 재앙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죽여야만 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생겨난 지2,000, 오늘 한국 교회의 하느님은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인 자들의 하느님이다. 오늘 양식 있는 사람들은 한국 교회에 분노한다.

 

 

 

 부자와 권력자들의 사교 클럽으로서 강남의 대형 교회들은 그 하느님 앞에서 가장 축복받은 교회들이다. 아프가니스탄 인질 사건으로 불거진 몹쓸 해외 선교 방식도 그 하느님 앞에서 한 치도 부끄러울 게 없다. 양심이라는 유전자가 처음부터 없는 듯한 어느 독실한 기독교인 대통령 후보 역시 그 하느님 앞에선 크게 쓰임 받아 마땅한 사람일 뿐이다.

 

 

 

 지성이 작동하려는 바로 그 순간, 지성이 작동을 멈추었던 순간을 되새겨보길 바랍니다.

 

 

 

 예수나 간디는 폭력에 의해 죽임 당했는데 예수나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따른다는 사람들은 왜1년 내내 뺨 한 번 맞을 일이 없을까요? 위협을 받기는커녕 폭력의 세력으로부터도 주저 없는 존경과 지지를 받을까요?

 

 

 

 아이들 몇 명을 붙들고 왜 그리 이명박이 싫은지 물어본 적이 있다. 아이들의 표현은 다양했지만 ‘논리 이전의 혐오’라는 점에선 일치했다. 나는 아이들이 그들의 앞 세대는 가지지 못한 어떤 직관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오늘날 좋든 싫든 제 아이를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대열에 참여시키고 있다면 ‘이명박의 노골성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명박 지지자’일 뿐이다.

 

 

 

 엄마는 아이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헌신하는데 아이 입장에서 엄마는 경기 성적에만 매달려 자신을 관리하고 괴롭히는 냉혹한 코치일 뿐이죠. 지금 이런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애를 쓰고 고생을 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 노동자가 배를 만들고 교원 노동자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부가 농사를 짓듯 지식인은 ‘지식 노동’을 하는 것이다. 지식 노동의 요체는 이 파악하기 어려운 사회의 구조와 본질을 인문적으로, 사회과학적으로, 혹은 문화예술적으로 해명하여 사회에, 즉 다른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일이다.

 

 

 

 자본화가 진행되고 자본의 가치관이 사람들에게 내면화하면서 한국은 어느새 자랑이나 존경마저 돈으로 구매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이 되었고, 디자이너의 예술적 재능과 감각 또한 매우 자연스럽게 자본을 위해 봉사하게 되었다.

 

 

 

 중학생이 대학에 들어갈 무렵이면 그3만 명의 적어도 절반 이상은 특정 지역 혹은 특목고 출신이 차지할 것이다. 결국 보통의 아이들이 대학 입시를 통해 유의미하고 즉각적인 ‘인생의 질’을 확보할 확률은2.5퍼센트 이하인 셈이다.

 

 2.5퍼센트 이하의 가능성은 어떤 것인가? 이를테면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살 가능성이2.5퍼센트 이하입니다”라고 말할 때 혹은 “살지 못할 확률이 97.5퍼센트 이상입니다”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는가?

 

 

 

 비슷한 이야기로, 한국의 직업은 대략1만 개다. 우리 아이들이 나중에1만 개 가운데 하나의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오늘 한국의 부모들이 제 아이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생각하는 직업은 몇 개인가? 기껏해야 20개 안쪽이다. 1만 개의 직업을 갖고 살아갈 아이들에게 20개의 직업만을 생각하며 몰아붙이는 부모들을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오히려9,980가지 직업을 갖고 살아갈 아이들을 인생의 낙오자로 만드는 사람들이 아닐까?

 

 

 

 ‘교회 밖의 구원’에 대해 개신교는 여전히 교리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를 통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으로 인정한 바 있다.

 

 

 

 말하자면 그는 아이가 학원을 안 다니면 경쟁에서 뒤처질 것이고 경쟁에서 뒤처지면 결국 불행한 인생을 살게 도리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명박 이름만 나와도 이를 가는, 자신이 세계관과 철학과 신앙에서 이명박과 정반대라 자부한다는 그는 이명박씨와 적어도 한가지는 같아 보였다. 바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평생 물질로 살아온 여든 된 해녀 할머니에게 물었다.

 “스킨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더 많이 수확하실 텐데요?

 “그걸로 하면 한 사람이 100명 하는 일을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안 하세요?

 “그렇게 하면 나머지 99명은 어떻게 살라고?

 

 

 

 닮지 않았는가? ‘훗날 역사가 평가하리라’ 되뇌며 불도저처럼 몰아붙이는 이명박 씨의 모습과 ‘훗날 아이는 나에게 고마워하리라’ 되뇌며 아이를 몰아붙이는 부모들의 모습은 말이다.

 

 

 

 말하자면 그 여대생은 우리가 사람을 됨됨이가 아니라 스펙으로 평가하며, 그런 사실을 더 이상 숨기려들지 않을 만큼 닳고 닳은 사람들임을 알게 해주었다.

 

 

 

 글이나 말, 혹은 기사나 성명서 따위 말고 실제 삶에서 말이다. 하긴 다른 구석도 있긴 하다. 이를테면 이명박을 지지하는 부모들은 편안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지만 이명박을 반대하는 부모들은 매우 불편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는다. 교육목적이 인간이 아니라 스펙이라는 점은 같지만 표정만은 정말 다르지 않은가?

 

 

 

 우리 아이를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키워야 한다. 그래도 현실이 어쩔 수 없지 않냐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명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이명박과 사이가 나쁜 사람들일 뿐이다. 여전히 억울하게 느껴지더라도, 사실이다.

 

 

 

 우디 앨런은 <애니홀> 도입부에서 카메라(우리)를 보며 뇌까린다. “쇼핑백을 들고 카페를 전전하면서 사회주의를 외치는 인간만 아니면 됐죠, .

 

 

 

 ‘내 아이, 남의 아이’ 가 ‘내 아이, 우리 아이’로 전환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가 행복하지 않은 세상에서 내 아이가 행복할 방법은 없다.

 

 

 

 대기업 임원들 연봉엔 분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조종사 연봉엔 한없이 분개한다. 노예는 주인의 호사는 당연하게 여기면서 다른 노예의 나은 처지는 참질 못한다.

 

 

 

 인간은 어느 단계부터인가? 어느 단계부터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수정란, 아니, 난자 한 개라도 함부로 다루어선 안 될 생명이지만, 진정한 인간은 ‘부끄러움을 아는 단계’부터다.

 

 

 

 “똥개야 짖어라, 기차는 간다.

 

 

 

 대화엔 두 가지가 있다. 이해하기 위한 대화와 이기기 위한 대화.

 

 

 

 사람은 내적 음성과 대화하고 외적 음성과도 대화할 때 비로소 고독하지 않다. 우리, 이른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건 대개 내적 음성과의 대화다. 우리는 고독할 기화가 적기 때문에 고독하다.

 

 

 

 사실 오늘 한국인들은 대입 문제 빼곤 교육 문제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런데 그걸 그대로 말하자니 민망해서, ‘대입 문제’를 ‘교육 문제’라 바꿔 말하기로 합의하는 것이다.

 

 

 

 머리는 텅 비어도 괜찮지만 외제 사치품을 메고 두르지 못하면 부끄러워 못 사는 그들은 ‘사치품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불편하니 ‘사치품을 명품’이라 바꿔 말하기로 합의하는 것이다.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오랜만에 전태일 유서를 읽다 이 구절이 다가왔다.

 

 

 

 진정한 비폭력주의는 ‘현장’에서만 주장될 수 있다. 진정한 비폭력주의는1년 내내 뺨 한 번 맞을 일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그시 눈을 내리깔고 설파하는 게 아니라, 폭력의 현장에서 그 폭력에 함께 노출된 사람들만이, 분노와 원한을 넘어 이루는 숭고한 경지다. 역사 속에서 위대한 비폭력주의자들이 반드시 폭력에 희생당한 건 그래서다. 목숨이 위협당하고 있지 않다면 진정한 비폭력주의자가 아니다.

 

 

 

 ‘도시인’이란 인간으로서든 생명체로서든 조화를 잃은 사람, 이를 테면 유기농 음식이 아니면 절대 먹으려 들지 않으면서 어쩌다 거름 냄새라도 맡으면 코를 싸쥐는 그런 사람이다.

 

 

 

 최난주 형에게 교사 일을 왜 그만두었는지 물었다. 몇 가지 이유를 말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이것이다.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그러기엔 교사 월급은 너무 많고 그게 늘 불편했어요.” 다른 생각을 할 줄 아는 것, 그리고 그 생각을 실제 삶에 실천하는 것. 그것을 지성이라 부른다.

 

 

 

 “하여튼 니미럴 요새는 장례식장에 가보면 두 가지 욕밖에 없더라.” “뭔데?” “하나는, 이렇게 죽을 걸 그렇게 욕심을 냈나!” “우하하, ?” “이렇게 죽을 거면 보험이라도 많이 들어놓고 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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