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시)
서쪽의 별
종합보험 독촉장이 날아왔다
어디서 무얼 타고 온 것일까
이것이 날아오기 전, 그곳은
평생 안전이 보장된 곳이겠지
안전하게, 근심 따위 없이
죽을 때까지 삼만구천 오백원을
매달 내기만 한다면
그런데 두 달이 밀렸다
건널목에 삐죽 어깨를 세우고 걷는 사람들
서슴없이 어깨를 부딪치고 웃음 짓는 얼굴은
얼마만큼의 보험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보험 없는 도시인들은 차라리
시인이나 되라지
보험이 멈춘 두 달 동안 겨우
나는 시인이었고 삶이 위험하였다
빨간 신호등아래 기생하는
앵벌이 할머니가 십자가럼 빛나는
후레쉬껌을 들이민다
잔뜩 껌을 씹는 하늘에는
보험 연체된 별들이 알알이 씹히고
잔뜩 밀린 별들은 서쪽 하늘로 이주하였다
어수선한 별빛을 맞으며 꺼내든 독촉장에는
좋은 말씀이 한 가득 묵직하다
지나가는 자동차 엔진실에는
물소가 한 마리씩 들어 있을 것 같다
꾸역꾸역 휘발유를 삼키며
자동차를 끄는 물소들에세 손을 흔들어
보험 없는 나를 들이받으라고
보험 없이 죽어 틀림없이
나는 아름다운 별이 될 테니
부웅 근심걱정 많은
서쪽의 목성이 될 테니
(신작시)
커피를 마시다 화장실 간 여자
커피를 마시다 가방 들고 화장실 간 여자
의 엉덩이를 생각한다 검정 스키니 바
지와 우산처럼 펼쳐질 팬티
자동 펼침 버튼을 더듬는 남자친구의 검
지손가락을 생각한다 화장실이 멀
면 멀수록 돌아오는 시간이 길
면 길수록 내 생각도 쫄쫄쫄 따끈하게 세상을
따라 흐를 것이다 여자가 마시던 커피는
화장실과 잘 어울리는 부드러운 크림 빛
깔이다 포크에 묻은 호두파이 찌꺼기는
잠시 후 그녀의 입안에서 씻겨나갈 것이다
그녀의 화장실에 장마가 졌으면 좋겠다 때
늦은 가을 장마 앞에 앉아 어깨 가디건을 홀로 추
스리며 찬비가 퍼지는 것 거품과 함께 밑으로 흐
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거울 앞에선 몸의 앞뒤를 돌려보며 누구에게나 가슴엔 장마가
있는 모양이더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치켜 올리는 검은 바지 사이에
올빼미 한 마리 외롭게 울다 날아가고 자기 자리 돌아온 여자가
대체 시간이란 무얼까 생각하는 동안 물기를 털 듯 초침이
움직이고 그 파장이 밀려와 내 커피잔에 작은 동심원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작은 구멍을 닮은 시간을 닮은.
시작노트
근1년 동안의 노트를 뒤적여도 소용이 없었다.
대부분의 시들이(솔직히 전부) 등단시만도 못했고, 무능력한 내가 등신 같았다.
그나마 몇 편을 뽑아놓고 머리를 굴려봤다.
비교적 신선한 직관이 살아있는 소품격의 짧은 시 하나를 의연하게 내보내면 어떨까?
직관만 있고 나머지가 없어서 오히려 흠잡을 곳 없는 그런 시를?
조언을 구한 치마가 잘 어울리는 아리따운 아가씨는 ‘서쪽의 별’과 ‘커피녀’ 두 편의 시를 고르더니,
“이 두 편이 같은 형식인데 사람이 너무 바뀌어서 재밌어.” 라고 말했다.
서쪽의 별을 상상하던 촌스럽고 순진하던 남자는,
까페에서 여자들의 화장실 씬을 상상하는 촌스럽지만 순진하진 않은 도시 남자가 되어있었다.
생각보다 슬프지 않은 걸로 봐서
알고 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