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적 생각은 간혹 사람을 당혹스럽게 할 때가 있다. 어쩌면 언제나.

 

우리가 처음 사랑에 빠지고 연애를 하는 이유는 사랑에 빠져서다.

그게 어떤 계기로, 어떤 인생을 살아와서, 어떤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가 됐든.

서로 사랑에 빠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된다.

그리고 사랑의 농도는 상승곡선을 그리며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하향곡선을 그리게 된다.

이게 가장 보편적인 모습이다.

광기에 빠진 집착 증세를 보여, 혹은 병적인 질투심에 사로잡혀, 스토킹을 하거나

그러다 뉴스에 나온 사례처럼 상대방의 애정 상실을 견디지 못하고 살인까지 저지르는 몇몇

독특한 사례의 경우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런데 사람은 이런 보편적 과정에 대해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랑 에너지가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다는 건

일반적인 물질법칙이나 자연의 법칙처럼 어떻게 보면 가장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사람 사이의 법칙인데 이 자체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우리는.

 

모든 근사한 컨텐츠와 스토리에서 사랑은 결코 자연스럽게 타올랐다가 자연스럽게 식고

그 자연스럽게 식은 사랑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그에 대한 대처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차후에 생각해보기로 하고) 법이 없다.

영원히 행복하고 뜨겁게 사랑하는 커플이 되거나.

누군가가 배신을 하거나.

누군가 보다 먼저 사랑이 식어서 떠날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나뉘거나.

온갖 다툼을 겪으며 어느새 증오하는 사이가 되어, 대체 내가 그 사람을 왜 사랑했던 거지? 가 되거나.

 

우리는 사랑의 시작에 대해서는 수많은 시뮬레이션과 기대를 가지고 있지만

사랑의 마무리에 대해서는 어떤 시뮬레이션도 기대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아름답게 시작한 사랑이 추하게 끝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별이 아름다울 수 있진 않다고 한다면, 그건 단지 우리가 이별의 아름다운 방식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아름다운'이라는 표현이 오해를 가져온다면, 평화로운, 혹은 자연스러운 이별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얼마 전 미국에서 유행한 이혼식문화를 보고.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고 사람의 사랑의 매커니즘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의 사랑의 매커니즘이 지닌 한계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래 우리도 저런 이혼식문화를 만들어내거나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식이란, 결혼한 두 사람이 충분히 살아보고, 이쯤이면 됐다. 우린 그동안 충분히 사랑했고

이제는 그 사랑의 감정은 일반인을 대하는 정도인 것 같다. 그렇다면 '사랑의 결혼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의 결혼은 큰 의미가 없어진 것 같다. 그러니 그동안의 행복했던 결혼생활에 감사하며

기쁘게 이혼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각자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

그래서 이혼을 하고, 그 이혼식을 기념하고 자신의 SNS에 포스팅하는 문화다.

 

사랑이라는 이상야릇한 존재는 어쩌면 생명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느순간 응애하며 태어나서 성장을 하고 강하게 자라나서 쇠약해지다가 죽는다. 혹은 죽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나이드는 걸 아무리 거부하려해도 거부하기 힘든 것처럼

사랑의 사그라짐에도 거부하기 힘든 어떤 힘이 있다.

물론 모두가 그렇진 않다. 예외가 존재한다.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서로를 완벽하게 사랑하는 것 같은 커플들의

사례도 우린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조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서로를 죽을 때까지 완벽하게 사랑하는 사례와

보편적인 사랑의 시작 성장 약화의 과정의 사례의 비율은 어떻게 될까.

 

답은 거의 나와있다. 우리의 바람과는 다르게 우리는 한갖 인간이고. 한갖 인간은 대부분

사랑에 대해 일정한 패턴을 갖는다. 그걸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에

연애의 후반부에서 자꾸 싸움이 일어난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엔 나에게 소홀해.

예전엔 더 뜨겁게 나를 사랑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달라졌어.

이 불길함. 이 불안함. 이 기분나쁨.

이런 느낌과 생각이 드는 이유는 실제로 상대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생각해볼만한 건, 그 달라지는 걸 달라지지 마! 라고 해서 안 달라지게 할 수  있을까?

 

식어가는 사랑의 부활, 에 대해서 내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변하지 마! 가 아니라 식어가는 사랑을 어느 시점에서 다시 시작되게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처음 사랑의 시작이 이제부터 나를 사랑해! 라고 해서 시작된 게 아닌 것처럼

이제부터 다시 사랑을 부활시켜! 라고 해서 될 수도 없다.

유일한 방법은 상대방이 다시 나를 매력적으로 느끼고 다시 내게 새로운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거고, 이제부터 다시 나를 사랑해! 라고 말한다고 해서 되는 쉬운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의 부활은 어떻게 보면 육식을 하던 곰이 채식을 하게 되는 것처럼(실제로 판다가 그렇게 진화했다는데) 어떤 법칙을 거스르는 초인적인 능력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의 후반부, 어느 정도 지난 시기에 찾아오는 위기에 대해서 얘기할 때.

그 찾아온 위기가 지극히 당연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대화하고 접근해야한다.

그걸 일단 부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에서는 어떤 얘기도 어떤 방법도 자기 위안 정도에 머무른다.

 

어떤 사람은 이별에 대해서 떠올릴 때, 상상도 하기 싫은, 것이라고 규정해버린다.

이별이란, 그게 굉장히 자연스러운 행태고(그게 싫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사람이 이미 네다섯번 혹은 그 이상의 이별을 살면서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다.

그런 상태에서 어떤 대화를 한다면... 그 대화는 대체 무엇을 위한, 무엇을 하려는,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 대화일까.

 

어떤 사람이 이별에 대해서 떠올릴 때, 그것은 대단히 감당하기 힘든 깊은 상실감일 수 있다.

그 상실감의 구멍이 자신의 인생에 커다랗게 생겨버리는 것에 대해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 상실감과 함께 도대체 어떻게 하루 하루를 견뎌나갈 수 있을지 무섭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생긱는 것 같을 때, 과도한 긴장과 과도한 민감함을 띌 수도 있다.

 

사랑이 존재하고 이별은 따로 존재하는 걸까.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데 이별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그 이면에는 언제나 이별이 따라다닌다. 그게 감정적 이별이든

하다못해 불의의 사고든.

그게 보기 싫어서 보지 않고 산다면, 세상의 모든 이별은 다 교통사고처럼 붕괴의 형태로

서로에게 큰 데미지를 입히면서 이뤄지고 만다.

 

그리고 정말 어마어마하게 높은 확률과 현실성으로(당신의 경험을 돌아보라. 당신의 꿈이 아닌) 사랑은 식는다.

결혼을 하고 다만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이 패턴을 비켜나는 건 아니다.

그냥 무시하는 것뿐. 그리고 죽은 사랑을 (되살리기보다) 가정이라는 형태로 받아들이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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