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엔카의 위빳사나 명상, 윌리엄 하트, 김영사, 2019(1판 5쇄)
무엇을 포함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빠뜨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양인이건 동양인이건, 기독교인, 유대교인, 무슬림, 힌두교도, 불자, 무신론자든 뭐든 간에, 우리는 모두 지속적인 주체로서의 ‘나’란 것이 내면의 어딘가에
있다는 타고난 확신을 가집니다. 우리는 10년 전에 존재했던 사람이 오늘 존재하는 사람, 앞으로 10년간 존재할 사람과 근본적으로 같은 사람이고, 아마 죽음 뒤의 삶속에서도 여전히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별 생각없이 가정하고
삽니다. 어떤 철학이나 이론, 믿음을 가졌든, 사실 우리는 “나는 과거에 이러했고, 지금 이러하며, 미래에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깊이 뿌리박힌 확신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붓다는 사람이라는 것은 완전하고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순간에서 순간으로 흐르는 하나의 과정임을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존재’라는 것은 없으며, 오직 계속되는 흐름, 지속적인 생성의 과정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고통이 일어나든 그 원인인 반응이 있다. 모든 반응이 멈추면 더 이상 고통도 없을 것이다.
고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방법을 배워야만 그렇게 될 겁니다. 만약 고통에 집착한다면, 그 경험은 당신을 고귀하게 만들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항상 비참한 상태로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아주 깊은 차원에서 고통은 우리가 인식.지각.감각. 반응을 통해 몸과 마음에 대해 갖게 되는 과도한 집착입니다.
우리는 갈망의 상태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한 욕망이 충족되자마자 또 다른 욕망을 일으킵니다. 대상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갈망의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갈망이 유쾌한 감각을
만들어내면, 우리는 그 감각을 연장시키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운이 좋은 삶으로 환생하기를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태어나지 않은 것이야말로 가장 운이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고통을 겪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반응하지 않고 관찰하십시오. 어떤 경험은 유지하려고 하고 다른 경험은 피하려고 하는 대신에, 이것은 가까이하고 저것은 밀어내는
대신에, 침착하게 평정한 마음으로 모든 현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기만 하십시오.
이게 쉬운 것처럼 들립니다만, 한 시간 동안 명상하며 앉아있다가 10분쯤 지나 무릎이 아파오면 어떻게 합니까? 맨 처음 우리는 그 통증을 싫어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사라지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사라지질 않습니다. 대신에
싫어하면 할수록, 그 정도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이 되어 큰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반응하지 않는 능력은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몸의 감각을 알아차리고 동시에 평정을 유지한다면, 그 순간 마음은 자유롭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명상 중에 몇 순간만 이런 경험을 할 것입니다. 그 몇 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감각에 반응하는 오랜 습관으로, 마음은 갈망. 혐오. 고통의 오래된 바퀴 속에 허덕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명상하면서 그 짧은 순간들이 몇 초가 되고 몇 분이 되어 마침내 반응하는 오래된 습관이 사라지면, 이윽고 마음은
항상 평화롭게 됩니다. 이것이 고통을 멈추는 방법입니다.
“볼 때는 봄만이 있고, 들을 때는 들음만 있다. 냄새를 맡을 때, 맛을 볼 때, 만질 때는 단지 냄새를 맡음, 맛을 봄, 만짐만 있다. 인식할 때는 오직 인식만 있다.”
“일어남의 성질을 가진 것은 무엇이든지 소멸함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 실제의 경험이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불쾌한 감각에 반응하지 않고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혐오를 제거합니다. 유쾌한 감각에 반응하지 않고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갈망을 제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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