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약간의 강박증이 있기 때문인지 약속 시간에 늦는 일이 거의 없다.
100번의 약속이 있으면 지각은 1% 미만이다.
차가 막혀서,
비가 와서,
도중에 누구를 만나서,
작은 사고가 나서,
늦잠을 자서,
약속을 깜빡 잊어서,
늦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말은 내 귀에 이렇게 들린다.
10년이나 도시에 살면서도 차가 막힐 것을 예상 못해서,
비가 오는 이유로 늦을 만큼 여유로와서,
도중에 만난 사람이 선약의 신의보다 중요해서,
어차피 늦었겠지만 다행히도 작은 사고를 발견할 수 있어서,
늦게 일어날 수 있다라는 예측도 못하고 방법도 마련 못해서,
이번 만남을 중요치 않게 여기므로,
상습적으로 늦는 사람들은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꺼낸다.
나의 경우 늦어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어쩌다가 늦게 될 경우,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다수의 사람들이 나와 같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수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10분 가량 늦는 것을 여유로움으로 받아들여준다면
아마도 그런 것이 우리의 문화로서 받아들여질 것이다.
다만, 그 무리에
포함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런 사람이다.
"3시 32분에 종로에서 만나자."라고 스스로 말을 했다면
3시 32분에 나는 그곳에 있어야 한다.
나는 학교에서 전혀 리얼리티를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리얼리티가 없다.
리얼리티 없는 것이 현실에서 지켜질리가 없다.
다시 예를 들어,
약속시간은 잘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교사가 늘 5분씩 수업에 늦는다고 하자.
이 경우 수업은 "약속시간 엄수"를 가르치지만
정작 리얼리티는 "5분씩 늦는 교사"에 있다.
이 수업에 참석하는 학생들은
"약속시간 엄수" 보다는 "5분씩 늦는 문화"를 체험학습한다.
근 1년 사이 서울에서 약속이 있을 경우
10명 중 8명 가량이 정시도착을 지키지 못했다.
내가 받은 "교육"에 따르면 나는 이들의 도덕성과 윤리성을 비난 할 수 있다.
그러나 10명 중 8명의 통계는, 그것이 보편준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나와의 약속에 늦은 8명은 누구와의 약속에 있어서든지
거의 매번 조금씩 지각을 한다.
영화관의 경우 관람 에티켓은 상영 10분 전 입장이다.
그러나 상영 10분 뒤에 입장하는 이들도 있을 뿐더러
10분 전 입장할 경우 다수가 어색함을 느끼며 왠지 빨리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 역시 관람 에티켓과는 다르게 나타나는 보편준거라고 할 수 있다.
상영 5분 전에 입장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뭐라고 한다면
오히려 다수는 나를 탓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의 학교에서는 리얼리티가 있는 학습을 이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약속이란 늦어도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실제로 다들 그렇게 하니까.
2. 거짓말은 맘껏 하세요. 실제로 다들 그렇게 하니까.
3. 공공장소에서 에티켓은, 여러사람들이 원하면 지키고 다수가 원치 않아 보이면 따라서 지키지 마세요.
결국 한국교육의 리얼리티를 한 마디로 하자면
"남들 하는대로"의 모방순응학습이다.
나의 경우, 그런 한국식 학습의 진의를 아직까지 깨닫지 못해서
초등학교 때 "약속시간에 늦는 것은 상대방에게 상처(피해)를 주는 행위"라는 의식이 강박적으로 작용하는 상태이다.
나의 이 병은, 주위사람들이 다들 약속시간에 무감각하면 따라서 무마되어야 할 것인데,
오히려, 나는 저것들과는 다르니까, 만에 하나 저들의 일부로 비춰지는 것이 두려워서,
더욱 강박증세가 강화되고는 한다.
상습적으로 지각을 하는 이들을 더럽게 생각할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상습적인 지각이 언제나, 늘, 한결같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삼성기업 면접시험 시간에 늦지 않는다.
즉, 이들은 약속이나 만남의 중요도에 따라서는 늦지 않기도 한다!
이 점이 모욕적인 이유는,
인류가 정의 내린 <약속>이란 개념의 순수성을 다분히 오염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약속은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지켜야 하는 것인가
이익이 될 경우에만 지켜야 하는 것인가
지켜도 되고 안지켜도 되는 것인가
만약 약속의 개념이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일 경우,
우리가 새끼 손가락을 걸고 "꼭 너를 지켜줄게"라고 약속하는 것은
"꼭 너를 지켜줄게 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 지켜도 되고 안지켜도 되는 거 알지?"의
의미가 되는 셈이다.
그럴경우, 크리스마스 선물을 약속받은 아이는
"제발 우리 아버지가 이번에는 약속을 지키도록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다.
조금 다른 논의로 "기껏 3분 늦은 걸 가지고 뭘 그래!"논의가 있다.
이 경우, 몇 분까지가 늦음이 허용되며 몇 분부터 허용이 되지 않는지의 증명이 필요하다.
뿐더러, 3분 가량 늦어도 된다는 묵시적 허용이 있을 경우,
나는 이렇게 할 것 같다.
3시에 만나고 싶을 때, "우리 2시 57분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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