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적에 나는 무언가를 하나 포기하면 분명

포기한 만큼 얻게 되는 무엇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 얻은 것을 당시에 눈치 채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얻은 것은 남아서 내 안에

흠집 투성이일지라도 진주 한 알 뭉쳐가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이 믿음의 근저에는, 질량 보존의 법칙과 상대성 이론의 영향이 있다.

 

나는 우주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내가 품은 것들 자체가 소멸하지는 않으며

내가 놓아버린 것들로 인해 비어버린 자리는 곧 다른 것들로 채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상대성 이론의 경우, 터무니 없이 내 방식으로 해석을 해버려서는

 

하나로 부터 멀어지게 될 경우, 필연적으로 다른 하나로 부터는 가까워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지금도 여전히 내 방식대로의 해석이기는 하지만,

 

내가 하나를 포기하는 순간에 다른 무엇이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를 포기하는 순간에 나로부터 포기된 그 하나 또한 나를 포기해 버리는 것이,

곧 상대성 이론이 아닌가 싶다.

 

내가 스무 살 대학을 들어가자 마자, 동시에 영어를 자명하게 포기해 버린 것은,

나는 영어를 포기한 추진력, 영어로부터의 반발력으로 인해, 국어나 국문 쪽에 보다

집중하고 몰입할 거라는 낙관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때 보지 못한 것은, 내가 영어를 포기한 순간, 영어 또한 나를

포기해 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그리 오래 살지 않아서

무언가를 포기한 순간, 오히려 그 무엇이 내게 다가오는 경험을 한 적이 별로 없다.

무언가를 포기한 순간, 혹은 포기하기로 한 그 순간에, 오히려 그것이 내게 다가오는

역설적인 경험은, 꼭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니다.

 

내가 프랑스행을 결정하기 까지, 누구의 조언도 귀담아 듣지 않은 척 하였으나,

사실 꽤 많은 것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그까짓 프랑스 가봤자, 길어야 몇 달이고 재수 없으면 일주일 만에 돌아올 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선택이 아마도 앞으로의 내 삶의 방향을 분명히 결정 지을 순간일 거라는

직감이다.

 

나는 스물 여덟 살이고, 올 봄에 졸업을 했는데, 올 봄 졸업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광고 회사에 카피라이터로 취직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광고 회사 신입 사원 채용에는 나이 제한이 있고, 올해 나의 나이가 커트라인이다.

내년이 되면 나는 원서 조차 내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다.

 

이 시점에서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어디 이력서를 내던 것도

아니던 나는 아마도 잠정적으로 "카피라이터"라는 직함을 포기한 것도 같다.

프랑스 행의 결정은 그런 포기하기로 한 결심을 안타까워하기 싫어서

의도적으로 공고히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겨우 2주가 남았는데, 또, 어제,

제일기획 선배님이 문자를 날려서, 10월부터 아르바이트로 카피 쓰는 일을 해보란다.

제일기획 국장님과 함께 하는 작업이란다.

이 선배님은 꼭 나를 좋은 카피라이터로 만들어서 좋은 회사에 취직 시키고 싶단다.

 

대체, 이 선배가 내게 이 정도로 알뜰하게 집착하는 이유에 대한 의문은 제쳐 두고라도

그토록 감춰져 있던 기회가, 포기하려는 순간에 속속 밀려드는 것은,

"또 시작이군, 또 시작이야"

이렇게 나를 중얼거리게 만든다.

 

내 삶이나 운명이 다시 한 번, 잠을 자다 등을 긁고 뒤척이듯이

꿈틀거리는 것인데, 언제나 선택의 결과는 알 수가 없고, 후회의 여지는

어느 쪽이나 한 바가지이고, 용기는 뒤틀리고, 승리의 깃발은 마요네즈 범벅이 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한다.

 

나는 연애에 있어서도 밀고 당기기 같은 걸 무척 싫어했다.

스무 살 때의 나는, 밀고 당기는 건 연애도 사랑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늘 항상 그자리에 있기 때문에 소홀하게 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떠날듯한 상대방의 당기기에 깜짝, 정신이 드는 사랑은 조촐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뭔가 알 것도 같긴 하지만,

그래도 싫어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이 일종의 우주를 구성하는 원리라고 하더라도, 싫은 건 싫은 거다.

 

포기한 순간 다가오거나, 체념한 순간 다가오는 것,

떠나려는 순간 상대방이 뒤돌아 서는 것,

정작 내가 다가서면 물러나는 것,

정작 엉금엉금 기어서 다가가면 허물만 남기고 비어버리는 것.

 

싫은 건, 싫은 거다.

 

스무 살 때로부터 약 7년 반을 더 숨을 쉰 나는, 분명

내가 포기하면 그것도 나를 포기하는 경험을 주로 했다.

내가 너를 포기하더라도 너는 나를 포기하지 말았으면, 하는 심정이야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이게 정당하다는 느낌은 남아 있다.

 

500원에서 700원으로 값이 오른 <요맘떼> 하드바를 핥아 먹다가

나도 모르게 놓쳐서 땅에 떨어졌을 때

바닥에 떨어진 <요맘떼>를 두고 멀어져 갈 때

분명 그것은 <요맘떼> 또한 나를 포기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놓인다.

 

나는 <요맘떼>를 포기하고 서둘러 건널목까지 걸어가는데

기우뚱한 표정으로 남겨진 <요맘떼>만이 나를 포기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요맘떼>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요맘떼>를 다시 주워서 먹든지, 혹은 다시 대화를 해봐야 한다.

 

나는 어쩐지 이것이 정당한 원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알면 알수록, 지표 밑을 뒤덮은 멘틀처럼, 나를 경악스럽게 한다.

겉보기와는 다른 이런 것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인가.

심리든, 기회든, 운명이든, 사랑이든지 말이다.

 

내가 TV 속 <은하철도 999>의 '메텔'을 사랑 할 경우,

나는 계속해서 '메텔'을 애타게 부르고 몸부림 치고 사랑에 미쳐 거품을 물더라도

'메텔'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때 나는

TV를 끄고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정작 내가 순수함만 가득한 채로 TV 모니터를 오려내어 이불 속에 넣고

함께 자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고 있을 때는 반응이 없던 '메텔'이,

어렵게 어렵게, 고심에 고심을 한 끝에, 늘 한 손에는 빠진 머리카락이 쥐어져 있던

시기를 보내고, TV를 끄고 '메텔'을 단념하게 되었을 때,

내게 다가온다면, 창문을 똑똑, 두드리고 나를 방문한다면, 내가 과연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을까.

 

화를 내지는 않을까.

 

장난 하냐고.

 

지구를 뒤덮은 보이지 않는 '장난'이라는 이름의 멘틀, 혹은 제 3의 원소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나는 발기하지 않는 성기를 내려다보듯이 흠칫, 흠칫, 놀라게 된다.

 

이런 세상에 맞춰 적응할 것이냐,

이런 세상에 맞서 대항할 것이냐.

 

꽤, 비약스럽기는 하지만, 프랑스로 떠남, 지지리 고생, 취직자리와 기회의 박탈.

이것은 세상에 대한 대항이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혹은 투정이겠지)

 

'루쉰'은 사회운동을 하면서 여기저기에 적을 많이 만들어서 원수가 많았다.

어느날 나이가 많이 든 '루쉰'에게 한 친구가 찾아와서, 유럽에서는 죽기 전에 원수들에게

용서를 빌거나 화해를 하는 문화가 있다고, 그래야 죽어서 편안하다고, 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제 죽을 때가 되었으니, 좋게 좋게 가라는 뜻이었을까.

 

'루쉰'은 그들에게 용서를 빌 마음이 없다고 했다.

대신 자신도 결코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또, 무엇에 화가 나는 것일까.

 

스무 살 적에는 거의 모든 것이 화가 나는 일들이었다.

해가 지면 떠오르는 불긋불긋한 십자가들.

(97년에 세어봤을 때, 내가 자취하던 방 창에서 보이던 십자가만 100개가 넘었다)

왜 십자가에 네온을 둘러 놓은 것인지,(하나님이 눈이 멀어서 그런가)

그 의미를 8년 째 알 수가 없으니, 8년 째 화를 접을 수가 없다.

 

사실, 그때는 불과 한 살 차이의 선후배 간의 깍듯한 존칭 같은 것들도 화가 났고

눈이 부셔서 태양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는 것에도 화가 났다.

 

 

뭔가 글을 끝내긴 끝내야 하겠는데 기운이 없다.

말만 스무살 적에, 어쩌구 하고 있지, 그때 같은 실감이 없다.

그때는 정말 배꼽 밑에서 부터 스파크 같은 것들이 일어나서

눈이 빨개지도록 몸 안에서 우르릉 꽝꽝 이런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은데,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착각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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