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세어보아도 일주일을 넘지 않는다. 떠나야 할 때까지의 시간.
프랑스를 간다, 고 하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들이
왜 가냐, 언제 오냐, 무얼 할 거냐, 계획은 있냐, 준비는 잘 돼냐.
그러면 또 내 대답들이
왜 가는 지 모르겠다, 언제 오는 지 모르겠다, 무얼 할 지 모르겠다, 계획은 없다, 준비하는 것도 없다.
그러면 결국 돌아오는 질문은
대체 뭐하러 가는 거냐, 이고
그러면 결국 내 대답은
나도 뭐하러 가는 지 잘 몰라서 가는 거다, 이다.
사실, 가서 뭐할지 뻔히 알고 있다면 대체 뭐하러 내가 거길 가겠냐고.
춘천에 와서 아침을 맞았다.
참 부지런히도 싸돌아다니는데, 정작 숙박과 식사는 여기저기서 만나는 사람들이 사주지만,
그들 만나러 돌아다니느라 차비로 돈이 동날 지경이다.
언젠가는 나도 죽겠지.
이상하게도, 나는 한 번도 죽어본 적이 없는데도
내가 언젠가 죽을 거라는 걸 안다.
사람들은 다 똑같애, 기껏해야 비슷할 뿐이야.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 이런 소리가 나는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타다
그래, 그래, 쿵, 쿵, 쿵, 하고 마주오는 차에 부딪치고는 한다.
그렇지 않다고 굴러가던 두 개의 바퀴가 마주 부딪치면서
그래! 하면서 튕겨 나가는 느낌을 사람들 속에서 받고는 한다.
열심히 한 자 한 자, 글자를 쳐가며 화면 가득 글자를 가득 채우면
기어코 버튼 하나를 잘 못 눌러 모두 지워져 버리고는 한다.
그리고 어차피 지워지지 않고 무사히 올렸다 하더라도 누구 봐 주는 사람 없이
방치되거나, 혹은 잠시 뿌듯해 하던 나, 본인의 미움과 실망을 받기도 한다.
그런 것처럼 태어난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버튼 하나로 삭제될 수도 있었던 별 쓸모 없는 문서, 감정의 나열만 가득하고
별다른 결론의 모색도 기대되지 않는 몇 장의 문서가 엔터 키 하나로, 인터넷 세상에
태어나듯이.
그리고 결국, 별 호응 없이 묻혀지거나, 어떤 식의 호응이 있었더라도 결국, 퇴색되고
늙고, 묻혀지고, 마지막에는 문서를 작성한 누구 조차, 내가 이런 걸 썼다니, 하면서
겸연쩍어하는 그런,
인터넷 상의 문서처럼 나는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언젠가는 너도 죽겠지.
언젠가는 너도 어른이 되겠지.
언젠가는 너도 결혼을 하겠지.
언젠가는 너도 떠나가겠지.
언젠가는 너도 잊혀지겠지.
라는 예상 환경에 처해지다 보면, 결국 경마장 경주마들이
1번마 부터 14번마까지 출전해서, 결국, 1등 부터 14등 안에 들어오는 것처럼
기분이 나빠지고는 한다.
어떤 말은 영원히 들어오지 않기도 하고 어떤 말들은 도중에 요리사가 되거나
히브리어를 하거나 우주 비행사가 되어서 달을 향해 날아가기도 하고
그렇게 도무지, 이 경주의 결말이 어찌 될 지 알 수가 없는
그런 경주를 한다면 좋겠는데.
이 시대의 경주는, 누가 더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학교를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높은 연봉을 받느냐, 하는, 제법 단순한 게임을 하고 있으며, 기껏해야 의외의 결말이라고는, 엉터리 학교를 나와서 상당히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게되는, 예상 외의 대박마가 나타나는 정도의 결말이거나,
기껏해야, 경기장 바깥에서, 이것은 인간다운 경주가 아니다, 돈이 곧 행복은 아니다, 라며
달리는 말이 얼마나 달리기를 즐기고 있는가, 얼마만큼 보람찬 땀을 흘리는가, 얼마나 아름다운
경주를 보여줄 수 있는가 하는, 경주의 질에 달린 것이라는 논쟁 정도가 벌어질 뿐이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 해야 할 100 몇 가지를 못했다고 아쉬워하거나 그걸 또 했다고 키득거리는
정도의 룰을 만들고, 20대에 해야 할 몇 가지를 한 사람들이 못해본 사람들을 놀리고, 또 못한 사람들은 부러워하고 그러면서 늙는다.
그것은 이를테면 인터넷 상에서 채팅 도중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선물 받고, 얼마 전 호사스런 유럽 여행을 경험했다고 말하는 것을
부럽다고 맞바다치면서, 다음에 또 즐팅하자고 헤어지는 것처럼,
참 별게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차라리,
그런 채팅을 끝내고 난 뒤 배가 고파 들어간 떡볶이 집의 떡볶이가 지나치게 맛있어서 감격할 때의 얼얼하게 열을 뿜는 볼과 혀의 기쁨, 그런 것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된다.
때때로
언젠가는 교체되고 버려질 키보드들이 사람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져서,
어느 한 키보드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근처에 지나가는 통통하니 살찐 사람 중 하나를 사냥해 와서 자리에 앉히고
손가락을 두들기는 노동을 해서 키보드 자신의 생각을 쭉쭉쭉 뻗어나오게 시키는 것 같다.
그러니까, 다른 예를 들자면
배설의 욕구가 가득 찬 한 남성이, 차마 제 손으로는 자위가 잘 되지 않아서, 어느 업소를 가서
젊은 여대생의 손을 빌려 자위를 마치는 그런 것처럼
키보드는 업소여성을 부르듯 사람을 불러 앉혀, 자신의 배설을 대리 시키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치면, 나는 아마도 키보드들의 세계에서는 몹시 솜씨 좋은 호스티스로 이름이 날 만도
하다고 생각한다. 주저하거나 망설이는 법 없이, 원하는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호스티스.
어때, 어때, R키를 만져주니까 좋아? Shift키가 쭉 쭉 뻗는게 기분 좋겠네.
그리고 마침내 Enter.
언젠가는
내가 틀렸다는 걸 알게 될 날이 올 수도 있을 거다. 그런데 문제는, 초등학교 어느 때부터
계속해서 나는 내가 틀렸다는 걸 지적받고, 내 삶을 바꾸고 싶어서, 기다려 왔는데
시간이 가면 갈 수록, 정작 그들이 모두 난장판으로 틀려 있는 모습이다.
언젠가는 결혼을 하고 언젠가는 아이를 낳고 언젠가는 죽는데,
되도록이면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고, 되도록이면 똑똑하고 잘난 아이를 낳아 기르고, 되도록이면 늦게 부유하게 죽으려 한다.
그러면서도 또, 책은, <인생의 의미>, <참된 삶>, <물욕을 넘어선 세계> 이런 것을 읽는다.
그러면서도 또, 요즘 잘나가는 논술선생과 관리 잘 되는 학습지와, 물 좋은 예식장을 대화한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임종의 순간을 그려 보라면
지구의 한국의 어느 도시의 어느 집, 혹은 어느 병원, 가족들 틈에서 조용히
잠들듯이 평화롭게 죽는 것을 상상하지 않을까.
나는 되도록이면 한국에서는 죽지 말아야지.
아이슬랜드에는 한국인이 모두 다섯 명이 산다는데,
내가 그곳에 도착하면 곧, 한국인이 여섯 명이 되는 신비한 세계.
술에 취한 야생, 붉은 곰의 강력한 팔 휘두르기를 맞고 모가지가 댕강 날아가서 죽는
아이슬랜드 어느 내륙지 개울가의 풍경, 같은 건 어떨까. 내 임종의 이미지로.
바람이 잔치국수처럼 분다
1500원짜리 스댕그릇에 넘치는 하얗고 말랑말랑하고 가느다랗고 깨끗하고 촉촉한 잔치국수처럼
용두동과 소양강을 휘적휘적 식히고 말고 구르고서 입안에 들어와 위속에 따듯하게 웅크리고 분
명 왕이 되는 꿈을 꾸고 있을 거다
눈물은 긴장해서 나는 걸까, 긴장이 풀어져서 나는 걸까, 긴장도 하고 또 풀어지기도 해서 나는 걸까.
언젠가 분명히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인데,
얼마만큼 대단하냐면, 총소리가 탕! 하고 성의 없이 눌러버린 Enter키처럼 태어나 버린
대다수의 경주마들, 트랙을 달려 순위가 매겨지고, 몇 번 쓰다듬어 지고, 결국
다시 마굿간으로 돌아가서 냄새 나는 똥이나 싸고 하루를 보내야 하는 말들 사이에서,
달리는 도중, 나를 타고 신나게 달리는 '인간'이라는 이름의 개똥을 떨어뜨리고
재갈을 뱉고, 안장을 풀러서, 그것을 팔아 노잣돈으로
업소 여성을 사서, 함께 미장원으로 놀러가는, 그런 경주마같은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무척 행복한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어야만 할텐데,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다가는, 나의 눈부신 표정을 보고서는 우울증에 걸려
폭식을 해서 돼지가 되어버리든가, 꺼이꺼이 울다가 기러기가 되어버리든가, 괜히
자식을 치근대서 아비처럼 되지 말고 공부하라는 녹음 테이프가 이식수술된 중고 턴테이블이 되어버리든가, 혹은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백 년 만에 처음으로,
내가 잘 살아가고 있는 건가, 회의를 갖게 될 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꼭 함께 같이 죽어보자.
누가 누가 죽어가는 몸에서 좋은 향이 나는지.
나는 경주를 포기한 것이 아니고, 조금 편법을 쓰고 싶은 것 같다.
가끔씩, 그렇게 되기를 바랬고, 가끔씩, 그렇게 되어 가는 지를 확인했고, 가끔씩, 그렇게 되어 좋았다.
인상주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왜 자신의 삶을 인상주의적으로 만들지 않을까 모르겠다.
해체주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왜 자신의 삶을 해체주의적으로 만들지 않을까 모르겠다.
코메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왜 자신의 삶을 코메디로 만들지 않을까 모르겠다.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왜 자신의 삶을 스릴러로 만들지 않을까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과 기호에 상관없이 언제나 사실주의, 그것도 까닭없는 사실주의로 만들 뿐이어서,
다큐멘터리 필름을 좋아하는 나로서도, 그들의 삶을 영화로 만든다면 차마 보러 갈 것 같지가 않다.
어떻게 잘만 해서, 내 삶을 영화화하도록 해야지.
지금까지는 영화의 초반부, 지루한 어린시절 쳅터가 되겠고, 이제부터 흥미로운 전개가 되도록 하지 않으면...
인천 월미도 놀이공원에 있는 회전나귀들처럼 먼지가 끼고 불어도 날아가지 않을 거다.
불어도 날아가지 않으면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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