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데서 "국어사전 좀 가져와라. 너 국문과지, 그러면 집에 있을 거 아냐."라고 내게 말했다.
................. 뭐 아무튼,
다음날 국어사전을 가지고 지하철 1호선을 탔다. 반대편 문 앞에서 'T' 앨범을 들으면서 가고 있는데 창가에 한 손 가득쥐어지는 묵직한 사전이 마치 성경처럼 보였다. 이 말은, 성경과 같은 의미를 지닌듯 보였다,는 뜻이 아니라, 겉모습(visual)이 묵직하고 두툼하고 칙칙한 성경과 닮아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고보면, 요즘 두껍고 무거운 사전을 가지고(휴대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없을 뿐더러, 설사 가방에 넣고 어딘가로 가는 중이라 하더라도, 지하철 안에서 사전을 꺼내 펼쳐보는 경우도 거의 없어졌다. 전자사전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것 같고, 국어사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전부터 그리 들고다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 이건 정말로 희귀한 일인데, 적어도 내 기억 속에는 손에 '국어사전'을 들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사람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반면... 영어사전이나, 기타 외국어사전이나, 전자사전이나, 특히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 모습은 자주 본 것 같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유독 성경책은 손에 들고 다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검고 두툼한 성격책을 한 손에 꼭쥐고 몸 안쪽으로 말아 붙이고 걷는 사람들을 보면 어쩐지, 그것이 책이 아니라 라디오 같다는 느낌이 든다. 스위치를 켜고 머리 위로 치켜 들면 사람의 입을 통해서 하늘나라 라디오 방송이 사악하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악하다는 느낌은, 그런 인간라디오들의 모습이 대부분 흉칙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지현이나 성유리나 한채영이 지하철 안에서 성경책을 높이들고 치지지직- 말씀방송을 틀어댔다면 천상의 소리처럼 들렸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하루빨리 성경도 전자성경으로 바뀌어서, 삼성 캐녹스 카메라처럼 slim하거나, 엘지 싸이언처럼 '돌아'가거나, 센스처럼 '디지털 신앙인'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아~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성경을 만들어 보급해서 돈좀 벌어 교회에 기부 좀 많이 하라는 뜻의 계시를 받게 된 것일까.
그래서 전자성경의 앞대가리에서는 빔프로잭트 영상으로 빨간 십자가를 총탄처럼 쏘아대고, 좁은 지하철을 핏빛 붉게 물들이고, mp3파일로는 찬송가를 bgm으로 깔며, 화상통신으로 하나님과 통화도 좀 하고, 기도 시간이나 전도 수에 따라서 레벨이나 도토리 같은 것을 모을 수있게 되서, 그 모은 레벨이나 도토리 얘기로 밥 먹을 때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어 대다가...
지하철이 도착한 것이다. 어딘 지도 모르고.
다만, 그 일이 있은 후로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도 나는
국어사전 안에 정말 국어가 들어 있는지 모르겠고
성경 안에도 정말 성스러운 말씀이 들어 있는지 잘 모르겠다.
혹시, 우리가 '국어'라고 정해서 그것이 국어인 것처럼
'성스러운 말씀'이라고 누군가 정해버렸기 때문에 성스러운 말씀인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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