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시간을 자고 일어나서 일요일은 짜파게티 먹는 날이라고 중얼거리며 씻고 두 군데의 문닫은 슈퍼마켙을 지나 편의점까지 가서 짜파게티와 콜라와 호빵 하나를 사와서 요리해 먹고 <해마>라는 책을 읽다가 발이 시려워졌다.

 

이리로 굴렀다가 저리로 굴렀다가, 그러다가 아버지가 빨아서 둥글게 말아서 방에 밀어넣은 양말을 구석에서 발견했다. 발목없는 여름 양말이라서 '집에서 신기 좋다'고 생각하며 그 양말을 주웠는데,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몇 년동안 한여름에도 집에서도 잠을 주무실 때도 그 여름 양말을 신고 계셨다.

 

핑크색에 무슨 동물 그림이 그려져 있던 걸로 봐서는, 어쩌면 애들 용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머니 발 사이즈가 얼마였더라 아주 작았는데. 가급적 들어오고 싶지 않았던 집이었지만, 결국 집에 들어오는 순간에는 그 시간이 새벽이건, 대낮이건, 어머니가 깨어계셨다. 그리고 다리가 저리다고 하셨다.

 

그래, 주무르긴 주물러, 내가 주무르긴 주무르겠는데 말이야, 양말좀 벗으면 안돼? 이게 뭐야, 맨날 양말 신은 발 주무르니까 찝찝하단 말야. 이거 발 닦기 싫어서 그런 거 아냐? 뭐? 신고 있어야 그래도 좀 덜 저리다고? 아니 무슨 암환자가 그런 것도 못참아. 사람이 적응력 뛰어나다잖아. 벌써 4년이면 저리고 당기고 쑤신 것도 좀 참을 줄 알아야지- 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리고 다시 엎드려서 <해마>를 줄 쳐가며 읽고 있었는데, 내 머리는 분명 책을 읽어가고 있는데, 발목은 또 발목 나름대로 어머니를 만나고 있었다. 차가운 어머니가 발목을 쓰다듬고 있었다. 정말인가 내려다보면 분명, 발밑에는 아무 것도 없고 누군가 내 발목을 잡고 있는 듯한 서늘한 감각도 사라지고, 전부 착각이었던 것이 될테니까,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내내 차가운 어머니는 내 발을 주무르고 있었다.

 

술 먹고 지 얘기 떠들어대는 인간들, 과 다른 대륙의 인간이라고 나는 생각해왔기 때문에, 못참고 어머니 얘기를 술자리에서 한 날에는 더욱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들 얼굴에 소금을 한 사발씩 끼얹어버리고 싶었다. 후회하면 어머니가 더 잘 떠오를테니까, 차라리 어머니 죽기 전에 후회할 일 잔뜩 해놓는게 낫지 않겠냐! 고 그들한테 말하기도 했었다.

 

<해마>를 다 읽고 pc방에 왔다. 돌아가는 길에는 만화책을 빌려 갈 생각이다. pc방 금연석 좌우에는 초등학생 남자아이들이 하나씩 있고, 둘 다 게임을 하고 있다. 이들의 어머니는 아마도, 나와도 그리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30대의 여성일 것이다. 이들은 그렇게 소리치거나, 다정하거나, 신경적이거나, 부드럽거나, 자신의 얘기에 잘 웃어주는 그 여자가 점점 할머니가 되어가는 걸 봐야만 하기 때문에, 지금 열심히 게임을 해두어야 할 지 모른다. 게임을 열심히 해서 몇 개의 관문을 깨고나면 어머니는 평생 그자리에 있을 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너구리>이후 게임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나는, 그때 아무리 해도 도무지 넘지 못했던 그 마지막 판을 그때 끝내 깨버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그후로도 <스트리트 파이터>며 <철권>이며 <삼국지>며 <스타크래프트>에 이르기까지 승승장구하며 어머니를 지켜왔을 지도 모른다.

 

아, 어째서 게임을 못치던 것, 당구를 못치던 것, 볼링에서 돈을 물던 것들이 다 어머니와 맞물리는지 모르겠다. 혹시라도 내가 후회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절대로 후회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내가 후회하는 것은 오히려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성들 연인이었던 분들에 대한 것이지,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니다.

 

어머니, 나는 지금까지도 어머니 생일을 한 번도 기억 한 적이 없었고, 어머니 주민등록번호를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어머니의 친구들에게도 관심이 있을 리 없고, 결혼기념일도 기억한 적이 없고, 왜 아버지와 결혼하셨냐고 말해서 식사중에 울린 적도 있다.  

 

나는 어머니 장례에도 별 관심이 없었고, 선산에 모시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고, 삼오제때는 귀찮아 했고, 어머니 돌아가신 날짜를 어떻게든 기억을 해보려고는 했지만 대략 시월 말경으로 치자,는 식으로 기억이 두루뭉실해지고 있고, 벌써부터 설날 제삿상 하나 더 차릴 생각에 귀찮고, 내년 어머니 제삿날이 오기 전에 제주도든지 일본이든지 구라파라도 가있고 싶다.

 

나는 혼자 살 거고, 혼자서 술 마실 거고, 혼자서 담배 필 거고, 혼자서 달빛 내리쬐는 마루에서 뒹굴거릴 거고, 그러다가 맨발로 마당에 뛰어내려가 나뭇가지로 여자애들 이름이나 써보면서 순식간에 늙어버릴 거다.

 

뒷산에 여우가 울면 나도 따라서 울거고 새가 날면 잡을 새총을 만들 거고, 햇살 따듯한 날에는 아파트 놀이터에 나가서 엄마들이 한눈 파는 사이에 애들이나 납치할 거다. 애들을 나무 둥치에 묶어 놓고 겁을 줘서 한참 울게한 다음 그 우는 소리를 듣다가 집에 돌려 보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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