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를 기다리며
어떤 시집들은
연애시를 찾아 날름거리는 이들의 손에 의해
목차들이 축축해지기도 한다
여자친구를 기다리며, 라고
제목이 달린 이 시는
미안하지만 친구여, 너가 원하는 그런 시는 아닐 것이다
너는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라든가
그녀를 읽듯이 별빛들을 쓰다*, 라는 구절을 기대했다면
닥스 지갑을 들고 나와 함께 백화점으로 가자
나는 지금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중이다
청량리에 맘모스 백화점이 있었을 때부터
저 앞에 서서 여자친구를 기다리겠노라고 다짐했던 소년이었다
면도를 해야지 하고 잠들면, 수염이 난 줄도 모르고 깨어 나가는 건
저주일까?
여자들은 줄곧 백화점으로 가고
무언가를 빠뜨리고 돌아오는 표정이다
내 삶이 저기에 있는데, 저 에스칼레이터를 따라,
싶은 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밥 젓가락을 깨작거린다
아, 내 여자친구도 저 백화점에서 팔 것만 같다
문 밖에서 사랑을 기다려도
남이 버린 허리띠와 양말 한 짝, 비에 젖은 비닐봉지
다리 하나 잘린 떠돌이 개와 눈이 빨간 비둘기나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가 왜
연봉삭감 당한 매장 판매원처럼 종종거리며
정강이와 허벅지 사이에
바다 속에 지갑을 빠뜨린 심청이처럼 쭐렁거리는 땟목 한 척
무릎 시린 바닷가
번진 종이조각 보인다, '여자친구를 기다리며'
그래서 그게 제목이다
* 안도현, 오태환 시인의 싯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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