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을 읽고서 쓴다.
집들이 그려진 풍경화를 보았을 때
멀리 있는 집들일 수록 작게 그려진 것이
나로서는 너무나 당연했다.
내가 보는 풍경이란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나는 결국 내가 보는 식으로만 풍경을 보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어쩌면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다를지도 모르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오스만제국의 화가들은
신의 눈으로 그림을 그린다.
신의 눈은
인간의 눈이 지닌 미천한 자각능력과는 다르기에
먼 곳의 집들이건 가까운 곳의 집들이건 동일한 크기로 그림 속에 표현된다.
인간 눈에 어떻게 보이는 것과는 상관 없이
신의 눈에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은 크게 그려진다.
신이 크게 보시기를 바라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놀라운 소설이 표현해낸 너무도 다른 세상에 감동 받는다.
그것은 그곳이 인간으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서가 아니라,
어째서 이런 것을 지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그런 것을 보여주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닌 감각기관 중에
가장 신뢰도가 떨어지는 기관이 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참으로 비참한 지각능력인 것이었군, 이라고
책 속 세상의 뉘앙스로 말해보았다.
얼마 전에 어안렌즈 카메라 피쉬아이2를 사려했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금방 질리고 사진도 이쁘지 않다고 말려서 사지 않았다.
이 카메라는 말 그대로 물고기의 눈처럼 사물을 보는 렌즈가 달려있다.
나는 셀카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남들이 셀카 찍는 모습을 보면 조소를 보내곤 하는 성격이다.
소위 '지랄하네' 라고 속으로 지껄이는데
뭐 딱히 이유는 없고
어지간히 취미가 없다고 여겨지거나
뭐랄까 그냥 좀 진정시키고 싶어진다는 충동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안렌즈 카메라를 사면
제일 처음 내 얼굴을 찍어보고 싶었다.
나는 늘 내 얼굴이 궁금하다.
저 강아지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흑백으로 보인다던데...)
물고기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TV속의 연예인들은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사람이 평생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사람이 지닌 모순성을 적나라하게 대변해주는 것 같다.
평생 거울이나 우물, 사진을 통해서만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은
평생 앞만 바라보게 설계된 눈의 구조는
상당히 저주받았다는 인상을 준다.
어쩌면 인간이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계속해서 신을 찾는 이유는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자신을 바라볼 수 없는 내가
다양한 방식을 통해 바라본 나의 모습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모습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이다.
그 얼굴이 특히 예뻐보여서가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안도감에 젖는 것이다.
오늘은 하루종일 눈이 따가왔다.
건조해서 그런 것도 같고
피곤이 누적되어서 그런 것도 같고
욕심이 많아져서 그런 것도 같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렸을 때
제가 욕심 많은 사람이 되거든 제 눈을 따갑게 해주세요,
같은 소원을 빌었던 것이 아닐까?
책 속의 화가들은
늙어서 거장 소리를 들을 즈음에
장님이 되어야만 진정한 거장으로 인정받는다.
그것은 전설적인 옛 거장이
충분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을 때
저절로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평생을 그림에 눈을 혹사시켜서이기도 하고
신이, 수고한 그 눈을 거두어들이셔서 그렇기도 하다.
그래서 늙은 화가들은 눈이 멀지 않으면
스스로 바늘로 눈을 찔러 눈을 멀게 하기도 한다.
어떤 화가들은 장님인 척 행세를 하고.
이틀 전에는 혼자 순대국을 먹는데
아버지 어머니 딸이 옆 테이블에서 식사 중이었다.
딸을 유학 보내기로 하였나보다.
유학에 대한 얘기로 시끄러웠다.
딸은 딸대로 신났고
부모는 부모대로 신난 모습 속으로 걱정스런 모습도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본 것을 뭐라고 얘기해야 되는 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글씨 색을 항상 회색으로 두는 이유는
흰 바탕에 검은 글씨를 보면 눈이 따갑기 때문이다.
회색은 그나마 덜 따갑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
사람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이 90% 이상이라고 하는데
그야 물론 사는 데 불편함은 없지만 서도
그렇다면 대체 뭘 보고 사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삶엔 도통 믿음이 없다.
그러나 한 편 무언가를 믿을까봐 겁이 난다.
무언가를 믿기로 하는 것은
"앞으로 저는 제 눈을 여기 얼굴 앞쪽에다가 두겠습니다" 하면서
눈 두 개를 앞에다 붙이는 것과 닮았다.
뒤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눈을 앞에다 달고 있으면서
어떻게든 뒤를 보려고 기를 쓰는 것이 내 모습의 일부분이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는 것은 뒤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뒤로 돌려 앞을 보는 것이다)
영화 <판의 미로>를 보면
손바닥에 눈 하나씩을 박고 있는 괴물이 나오는데
차라리 그 괴물이 더 우월한 것 같다.
손등을 마주대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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