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싸우는 남녀를 보았다.
여자는 얼굴이 빨개져서 무척 억울해 보였다.
남자의 뒷모습은 공격적이었다.
화가 나서 화를 내는 사람이 있고
억울해서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
남자가 여자친구 있는 것을 숨기고 여자애들과 놀러 다니다가 들켰다면
남자가 잘못한 것이니 싸움이 나지 않을 것 같지만
싸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여자는
배신감에서 비롯된 화가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화를 내자 억울함으로 전이된다.
이런 케이스의 싸움이
한 사람은 화가 나서 화를 내고
한 사람은 억울해서 화를 내는 구도다.
그렇다면, 이 경우 남자는 왜 화를 낼까?
기본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여자친구가 있는 데다가 다른 여자까지 만나 한창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데
한 순간에 이런 상황으로 바뀌어버렸으니
그 스트레스는 꽤 크다.
스트레스가 생기면, 그 원인에 대해 화가 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스트레스를 꾸역꾸역 받아들이길 바라는 여자친구의 꾸짖음에 대해
화가 날 밖에.
다른 이유는 지기 싫어하는 성미다.
타인, 혹은 상사, 혹은 권력자에게는 비실비실거리면서도
자기 여자친구에게 지는 건 잘 견디지 못하는 남자 특유의 성미가 있다.
그건 여자가 남자로부터 보호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것처럼
남자에게는 여자로부터 존경 받고 싶은 욕구가 크기 때문이다.
실상, 진심으로 사죄하는 행동이 결과적으로는 더 존경스런 모습일지 모르나
당장은 존경 받고자 하는 욕구에 찾아온 이 위기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갖은 논리와 열정을 앞세워 화를 내는 것이다.
이를 테면,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러냐!”
그런데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 남자는 사과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그래서 화를 낸다.
모르는 사람에게, 혹은 거리감 있는 사람에게 형식적으로 사과하는 것은 잘한다.
그러나 정작, 진짜 잘못했을 때는
사과를 잘 못한다.
어떻게 되겠지- 라는 정신이랄까.
혹은, 아직은 확정되지 않은 나의 잘못이 나의 사과를 통해
명백해지는 것에 대한 위기감이랄까…
아니면,
정치가나 범죄자나 공무원들의 형식적인 사과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사과를 하는 나의 모습이
그렇게 보일 것 같기 때문인 걸까.
창피함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해도
차마 자기 꼴이 그렇게 되는 것이 조금도 멋지지 않아서 늘 창피함을 도피해대는 것처럼
어쩌면 우린,
멋지게 사과하는 모습을 너무나 본 적이 없는 게 아닐까?
멋지게 사과한다는 게 어떤 건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봐야 하겠지만,
본보기가 될 만한 텍스트가 너무 없는 것 같다.
나는 청소년기 때 좀 예민했었기 때문에
유서를 몇 번 쓴 적이 있다.
그 중 한 번은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해놓고
깜박 잠들어 약속 장소에 나가지 못했을 때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된다고 유서를 쓰고선
밤 10시 즈음까지 동네를 방황하다가
친구에게 들켜 사과를 하고 용서를 받았다.
내가 나오지 않자, 화가 난 친구가 내 방에 쳐들어 왔는데
유서가 있어서 몇 시간 동안 나를 찾아 다녔던 것이다.
이것이 상당히 우스운 짓이었다는 걸 안다.
내겐 어려서부터 코미디언의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한편,
이후로 성장해가면서 이런 저런 만남을 갖다 보니
상습적으로 5-10분 정도를 늦는 친구들을 종종 보게 된다.
이들은
“내가 먼저 10분 기다리느니 상대방이 나를 5분쯤 기다려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렇다.
상습적으로 늦는 친구와 함께 약속장소에 가기로 하고
그 친구의 집으로 찾아가서
그 친구의 외출 준비를 가만히 지켜보면 알 수 있다.
조 금 이 라 도 일 찍 나 갈 까 봐
가장 아슬아슬한 시간까지 미뤘다가 집을 나서는 모습을.
재미있는 건,
이런 사람들일수록 자신이 제 시간에 나왔을 때
자신보다 늦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내게 코미디언의 소질이 다분했다고 한다면(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이들은 비극 배우들일까?
세상을 온통 우중충하게 만드는...
생각보다 사과는 쉽지 않다
'som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눈은? 다만 따가울 뿐... (0) | 2006.12.11 |
---|---|
똥차 (0) | 2006.12.11 |
옮겨 적은 편지, 언제 또 써보게 될까... (0) | 2006.12.06 |
검색창에 바보를 치면 내가 나온다 (0) | 2006.12.01 |
머릿 속은 회의중... (0) | 2006.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