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연습장에 쓴 다음 다시 옮겨 적은 것,을 알아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건 아주 놀라운 경험이었다.

 

왜냐하면 요즘은 초등학생이라도

먼저 연습장에 쓴 다음, 이렇게 저렇게 고쳐 쓴 다음,

그것을 귀찮게 편지지에 옮기는 소중한 짓을 하진 않기 때문인데,

여전히 그렇게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을 뿐더러

그것을 알아보기 까지 한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도 고등학교 3학년 까지는 다시 옮겨 쓰는 이런 짓을 했었다.

정성을 들이면 들일수록 내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한다는 착각을 느끼곤 했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연습장에 한 번 쓴 뒤 옮겨 적어 본 적이 없다.

글씨나 글 쓰는 것이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옮겨 적는 것이 귀찮고 쓸모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틀리게 쓸까봐 연습장에 먼저 쓰고 난 뒤 옮겨 적는 것이 아니라

틀리면 그냥 찢어버리고 다시 쓰거나

그때쯤 한창 유행한 화이트 수정액으로 덮어버리곤 했다.

 

지금 누군가 내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것이

한 번 쓴 뒤에 옮겨 적은 것이라면 솔직히 감동 받기 보다

부담스럽거나 짜증이 날 것 같다.

 

내 책상 위에는 기네스 생맥주 잔에 물이 채워져 있고

이름 모를 외국 꽃 3종류가 하나씩 꽂혀 있다.

 

요즘은 그냥 적당한 게 좋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이건 어찌나 편안하며 긴장할 필요도 없는지

 

아마 연애를 시작하더라도 그냥 적당하게 하겠지.

 

오래 전이 아니라 불과 작년까지

사랑을 한다면 지독하게 바보스럽게 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상대방이 유학을 가면 나도 유학을 가고

그 사람이 지방에서 산다면 나도 지방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일을 구하고

학교를 그만두길 바란다면 얼마든지

직장을 그만두길 원한다면 당신 뜻대로

꼭 그런 상황을 바랬던 것이 아니라 나름의 비교놀이였던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을 얻기 위하여 어느 선까지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가, 하는.

가족, 직장, 학교, 친구까지는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랑을 하자고

마음 먹고 있을 때면

늘 사랑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사랑에 대한 욕심에 잔뜩 몸을 부풀린 소용돌이처럼

내 주위로 차마 접근이 힘들었는지도 모르지.

 

어느 연애 잘하는 대리님과 술을 마시다가

요즘은 여자 꼬실 때 꽃 들고 서있으면 퇴짜 맞는다고

샤넬 가방 정도 하나 들고 서있어야 성공한다고, 하는 말을 성심껏 들었다.

그리고 꼭 해봐야지, 하고도 생각했다.

 

오늘 문득, 예전 펜팔하던 여자에게 할 말을

몇 번씩 고쳐 써서 맨 마지막에

때 탈까봐 멀찍이 떨어뜨려 두었던 편지지에 옮겨 적던 생각을 했다.

 

지금 같으면,

그거 티도 안 나고 폼도 안 나는데

꽃배달 전화를 하거나 가방 하나 사고 말지

할 것이다.

 

게다가 나도, 정성스레 눌러 쓴 편지를 받느니

근사한 선물을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2006년이 끝나갈 때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하고 나중에 돌아보면

웃게 될지, 울게 될지...

 

이 외국꽃 세 송이는 올해 안에 다 죽겠지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모양으로...

 

너무 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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