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오탁번, 황금알, 2006
밤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오가혜
죔죔
고사리 손
눈부신
웨딩드레스
아빠 눈은
은하수 물결
가혜 눈은
별빛
아주까리
사백 살 먹은 느티나무가
꽝꽝 뿌리내리는 소리 잘 들리는
우주의 적막 속에
아주까리꽃이
- 아주까리 아주까리
실고추처럼 속삭이네
아주 까?
정관수술해서
광속(光速)의 탄알은 없다마는
아주까리?
북한인민들이 죽어가는데도
뭐, 북한 인권법은 안 된다고?
네미랄!
아주 까고
여의도 마당에
오줌을 내갈기랴?
느티나무 굵은 뿌리가
먼 두만강까지 퍼져가는
우주의 적막 속에
실고추처럼 매운
아주까리꽃이 간지럽네
숨은 딸
나도 숨겨 논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아빠’ 부르면서 카네이션 꽂아주며
내 볼에 뽀뽀해줄 보조개도 예쁜 내 딸!
‘어험, 어험’ 하며 처음에는 멋쩍겠지만
내심으로야 뛸 듯 좋을 거야
아내는 뽀로통해서 눈 흘기겠지만
덤으로 생긴 딸 설마 구박은 안 하겠지
보름달 따올 만큼 힘세던 내 젊은 날
숨겨 논 딸 하나 못 만들고 무얼 했을까
숨겨 논 딸이 없어 민망하긴 하지만
제 발로 숨어버린 딸은 많을지도 몰라
아득한 젊음의 새벽길에서
눈물 훔치며 떠났던 여자들이
나한테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딸 하나씩 몰래 낳아 키웠을지도 몰라
숨어버린 딸이 운명(運命)의 해후(邂逅)를 위해
광속(光速)으로 달려와 내 앞에 선다면
DNA 검사 없이 바로 내 딸을 삼을 거야
호적(戶籍)에도 바로 올리고 재산도 나눠주고
큰 눈동자 빛나던
내 젊은 날의 흑백사진 보여줄 거야
아아, 우주(宇宙)의 어느 행성(行星) 새벽 바닷가에서
사랑의 불장난으로 태어난 어여쁜 내 딸아
지구(地球)가 혜성(彗星)에 부딪혀 파멸하는 날이 오면
나는 숨어있던 내 딸을 데리고
빙하기(氷河期)를 견디며 살아남아 있을 거야
몇 천 년 몇 만 년이 흐르고
빙하(氷河)에 짓눌렸던 한반도(韓半島)가 다시 떠오르면
나는 내 딸을 데리고 화석(化石)에서 뛰어나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집 한 채 지을 거야
춘일(春日)
풀귀얄로
풀물 바른 듯
안개 낀 봄산
요요요 부르면
깡종깡종 뛰는
쌀강아지
산마루 안개를
홑이불 시치듯 호는
왕겨빛 햇귀
설한(雪寒)
장작난로에서
참나무가 참!참!하면
소나무도 소!소!하는
잣눈이 내린 겨울날
내 살과
뼈
한 줌 재 되는 소리
정말 들린다
물이 끓자
주전자 조동아리
회회 휘파람 불며
가쁜 숨 토한다
7할이 물로 된
내 몸
휘파람 부는 소리
정말 잘 들리는
깊은 겨울날
탑(塔)
원서헌 연못가에
삼층석탑을 모셔다 세웠다
시집간 딸이 와서 보더니
탑이 너무 예쁘다면서 물었다
- 아빠, 이 탑 어디서 났어?
석탑에 비낀 노을을 보며 내가 말했다
- 며칠 전 천둥 번개가 치고
무지개가 솟더니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졌단다
- 엥?
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실 왔던 이장이 한마디 했다
- 그럼, 우리 동네에서는 그런 일이 흔해
누가 시인이고 누가 농부인지!
나, 원 참, 정말 모르겠네
새 나라의 어린이
새벽 별 이울기도 전에 잠이 깬
갓 육십 먹은 새 나라의 어린이가
몇 백 살 먹은 느티나무에게 아침인사를 한다
-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 오냐, 오냐
단풍 든 느티나무 잎이 막 떨어진다
달걀 한 꾸러미 장에 내다 팔아서
할아버지 장수연(長壽煙)과 문화연필을 사오던
새 나라의 착한 어린이!
몇 백 년 된 검버섯 할아버지의
버섯빛 구레나룻이
낙낙한 삼베적삼같이 막 흩날린다
기차(汽車)
할머니가 부산하게 비설거지하고
외양간 하릅송아지도 젖을 보챌 때면
저녁연기가 아이들 복숭아뼈 적시며
섬돌 아래 고샅길로 낮게 퍼졌다
숙제 끝내고 토끼풀도 다 뜯어다주고
심심해서 사물사물해졌을 때
산 너머 기차 소리가 들려오면
몽당연필에 마분지 공책 들고
아이들은 앞산 등성이로 달려갔다
까치발 암만해도 기차는 보이지 않고
두엄더미 지렁이울음처럼
기차소리만 치치포포 하릿하게 들렸다
기차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귀를 모으고 기차소리를 들으며
재바르게 기차 그림을 그렸다
여물통 같은 기차, 달구지 같은 기차!
개다리소반 같은 기차, 바소쿠리 같은 기차!
아이들은 기차소리를 그리며
멀고 먼 나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손에 쥔 기차표 하뭇해하며
아득한 미리내 여울 건너듯
저녁연기 밟으며 돌아올 때면
깜깜해진 비구름이 빗방울 흩뿌리며
쏭당쏭당 개찰하듯 기차표를 적셨다
블랙홀
같은 동네에 사는 이종택과 함께
백운지(白雲池) 아래 방학리(放鶴里)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김종명이네 집에 놀러 갔다
멍석에 널린 고추가 뙤약볕같이 따갑고
함석지붕에는 하양 박이 탐스러웠다
누렁이 한 마리가 마당에서
제 똥냄새 맡다가 꼬리를 쳤다
찰칵! 한 장 찍고 싶은
우리 농촌의 옛 풍경 속으로
재작년 추석 무렵에 무심코 쑥 들어갔다
안방에서 머리가 하얀 안노인네가 나왔다
어릴 때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나는 어른들께 답작답작 큰절을 잘 했다
그러면 친구 어머니가 씨감자도 쩌주고
보리살 안쳐 더운밥도 해주곤 했다
- 종명이 어머니가 여태 살아계시는구나!
나는 얼른 큰절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몇 만 분의 1초의 시간이 딱 멈추었다
종명이가 제 어머니에게 말하는 소리가
우주에서 날아오는 초음파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 임자! 술상 좀 봐!
초등학교 동창 마누라에게 큰절할 뻔한 나는
블랙홀에 빠진 채 허우적거렸다
머리가 하얀 초등학생 셋은
무중력 우주선을 타고
저녁놀 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 방학리(放鶴里)에 왔으니 학(鶴) 한 마리 잡아다가
안주로 구워먹자 씨벌!
종택이와 종명이는 내 말에 장단을 맞췄다
- 그럼 그렇고 말고지, 네미랄!
광속(光速)보다 빠르게 블랙홀을 가로지르는
학(鶴)을 쫓아가다가
그만 나는 정신을 잃고
종택이 경운기에 실려 돌아왔다
감자밭
흙냄새 향기로운 감자밭 이랑에
하양 비닐을 씌우는
농부 내외의 주름진 이마에는
따사로운 봄볕이 오종종하다
서방은 비닐을 앞에서 끌고
아낙은 뒤에서 그걸 잡고 있는데
비닐 끝을 흙으로 덮기도 전에
자구 앞으로 나가니까
소를 몰 때 하듯이 아낙이 말한다
- 워! 워!
그 말을 듣고
서방이 씩 웃으며 한마디 한다
- 워, 라니?
흙을 다 덮은 아낙이 말한다
- 이랴! 이랴!
신방에 들어가는 새댁처럼
가지런한 감자밭 이랑은
물이랑 되어 찰랑이는 비닐을
비단 홑이불처럼 덮고
제 몸을 어루만져주기를 기다린다
농부 내외는
바소쿠리에 가득한 씨감자눈을
비닐을 뚫고 하나하나 꾹꾹 심는다
멧돼지와 고라니들이 내려와
감자를 반나마 나눠먹을 테지만
주먹만한 감자알을 떠올리며
새흙을 덮어 다독여준다
감자밭 이랑은
아기를 잉태한 새댁처럼
다소곳이 엎드린 채
감자알이 여무는
하짓날 긴긴 해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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