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겨울
이병률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화초에 물이 흥건하고 밥 지은 냄새 생생하다
사흘 동안 동해 태백 갔다가
제천 들러 이틀 더 있다 왔는데
누구나 내 집에 다녀갔다
누군가 내 집에 있다 갔다
나는 하락한 적 없는데 누군가는 내 집에 들어와
허기를 채우고 화초를 안쓰러워하다 갔다
누군가는 내 집에 살다 갔는데
나는 집이 싫어 오래 한데로 떠돌았다
여기서 죽을까 살을까 여러 번 기웃거렸다
누군가 다녀간 온기로 보아
어쩌면 둘이거나 셋이었을지도 모를 정겨운 흔적 역력하고
문이 그대로 잠긴 걸 보면
한번 왔다가 한번 갈 줄도 아는 이 분명하다
누군가 내 집에 불을 놓았다
누군가 내 집에서 불을 끄고 아닌 척 그 자리에 다시 얼음을 놓았다
누군가 빈집에서 머리를 풀어 초를 켜고 문고리에 얼굴을 기댔다
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
이병률
눈은 내가 사람들에게 함부로 했던 시절 위로 내리는지 모른다
어느 겨울밤처럼 눈도 막막했는지 모른다
어디엔가 눈을 받아두기 위해 바닥을 까부수거나 내 몸 끝 어딘가를 오므려야 하는지도 모르고
피를 돌게 하는 것은 오로지 흰 풍경뿐이어서 그토록 창가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애써 뒷모습을 보이느라 사랑이 희기만 한 눈들, 참을 수 없이 막막한 것들이 잔인해지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비명으로 세상을 저리 밀어버리는 것도 모르는 저 눈발
손가락을 끊어서 끊어서 으스러뜨려서 내가 알거나 본 모든 배후를 비비고 또 비벼서 아무것도 아니며 그 무엇이 되겠다는 듯 쌓이는 저 눈 풍경 고백 같다, 고백 같다
저녁 풍경 너머 풍경
이병률
일 마치고 돌아오는 길가 황혼에 눈길을 주다보면 저 멀리 풍경이 강가에 다리 놓는 모습 보입니다
강 저편에서 강 이편으로, 강 이편에서 강 저편으로 서로 각자의 기둥을 놓고 손을 내뻗는 모습에 무작정 속이 아리다가도 그 속도가 아름답기도 하고 장해 보이기도 하여 창자가 다 휘둘립니다
며칠에 한번쯤 통장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신(神)은 자꾸 자리를 만들고 허문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당신들도 지워졌으므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당신은 당신들의 장엄한 일들을 해야 합니다
당신도 목숨 걸고 자본주의의 풍경이 되는 일을 합니까
한 풍경이 등짐을 지고 일 갔다 돌아옵니다
자꾸 먼 데를 보는 습관이 낸 길 우로 사무치게 사무치게 저녁은 옵니다
다녀왔습니다
외면
이병률
받을 돈이 있다는 친구를 따라 기차를 탔다 눈이 내려 철길은 지워지고 없었다
친구가 순댓국집으로 들어간 사이 나는 밖에서 눈을 맞았다 무슨 돈이기에 무산까지 받으러 와야 했냐고 묻는 것도 잊었다
친구는 돈이 없다는 사람에게 큰소리를 치는 것 같았다 소주나 한잔하고 가자며 친구는 안으로 들어오라 했다
몸이 불편한 사내와 몸이 더 불편한 아내가 차려준 밥상을 받으며 불쑥 친구는 그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그들은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것 같았고 친구는 그러니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언 반찬그릇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흘끔흘끔 부부를 훔쳐볼수록 한기가 몰려와 나는 몸을 돌려 눈 내리는 삼거리 쪽을 바라보았다 눈을 맞은 사람들은 까칠해 보였으며 헐어 보였다
받지 않겠다는 돈을 한사코 식탁 위에 올려놓고 친구와 그 집을 나섰다 눈 내리는 한적한 길에 서서 나란히 오줌을 누며 애써 먼 곳을 보려 했지만 먼 곳은 보이지 않았다
요란한 눈발 속에서 홍시만한 붉은 무게가 그의 가슴에도 맺혔는지 묻고 싶었다
절벽 갈래 바다 갈래
이병률
절벽 갈래 바다 갈래
옆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한무리의 사람들 속에서 들리는 말
나는 속으로 대답한다
둘 다 갈래
알고 보니 절벽이라는 이름의 술집이란다
술집 이름이 바다란다
어둠을 대상으로 술을 마셔야 할 사람들은
절벽이란 말이 바다라는 말이 신(神)의 이름 같다
절벽 혹은 바다는 사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에나 있어도 무방하다
절벽 가자 하는 것은 절벽 끝에 서서 일렁이자는 것이 아니고
바다 가자 하는 것은 바다에 몸 담그러 가자는 말이 아닐진대
한밤에 그 말을 들으며 몸을 세우고 마는 당신 혹은 나
늦은 시간 묵묵히 그곳을 향하여 패를 던지자는 것이다
당김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절벽 혹은 바다로 가서 저 허공으로 던져진 당신 혹은 나를
발버둥치는 몸짓을 낚아채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저 먼 곳 어둠속 허공 어딘가로부터
여린 기타소리 같은 가닥이 잡혀와서
그 멀리에 딱딱한 잡을 것이 있으리라는 가정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절벽 혹은 바다란 말은 그리하여 한밤중에 독으로 피거나
혹은 꽃으로 피어나 물들이는 것이다
흘러가는 것이다
독 만드는 공장의 공원들은
이병률
내 좌심방과 우심실 사이, 독(毒) 만드는 공장의 공원들 모두에게는
음독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았고
자신이 하는 일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조도 받았다
독이 어디로 팔려나가는지
수출되는지 내수용인지 공원들은 알지 못한다
아주 늦은 밤 검은 개가 짖고 큰 차가 오고
셔터소리 두 번 들리면 독이 든 상자는 밤이 조금만 더 잠잠해지길 기다린다
공장에는 실험용 흰쥐 수백 마리가 살기도 한다
실험으로 죽은 쥐들의 혀에서 주사기로 감정을 빼내 만들어진 독은 개별 포장되기도 한다
공원들의 하루 목표량은 독 30밀리그램으로
하루 아홉 시간 동안 어둔 창살 안에서 만들어지는 양이라 한다
이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독은 독으로서가 아니라
식용으로도 쓰인다는 사실을 공원들도 대표도 모른다
하지만 눈이 사시인 생산직 소녀의 귀띔에 따르면
아주 미량의 독은 슬퍼지는 데 쓰이기도 한다고 한다
황금포도 여인숙
이병률
1
혼자 죽을 수는 없어도 같이 죽을 수는 있겠노라고
낯선 눈빛이 낯선 다른 눈빛에게 말을 건다
처음 본 남자 여자가 느릿느릿 서로의 눈빛을 따르는 해질녘 과일시장
먹겠다며 산 반 상자의 포도를 물린 여자는
역에서 기차표 두 장을 끊어 눈빛만으로 사내의 의지를 두어 번 더 확인한다
어딘가로 향하는 기차 창밖으로 비둘기 수십 마리가 따른다
난 다시 태어날 거예요
아니, 난 다시 태어나지 않으렵니다
더 이상 말도 눈빛도 교환해서는 안되는 두 사람은
오로지 죽자고 한 손을 묶고 있을 뿐
뒤를 당부할 일 없으므로 이름도 모른다
기차 선반 위에 가지런히 두고 내린 두 사람 가방 위로
수십 마리 감정이 내려앉아 가방 속을 어지를지라도
그 먼 길 혼자가 아니라면
그 얼마나 마땅히 다시 돌아올 길인가
2
여자가 그리되어 화장하던 날, 마음가짐 몸가짐을 못하겠는지
여자가 머리카락인지 나뭇잎인지를 뚝뚝 잘라
바람을 태워 화장터 사방으로 내버리던 날
낯선 사람이 당신 가족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지
젊디젊은 분한테 어쩌다 이런 변이
우리 아들도 밤길 운전하다 사고로 그만
아직 결혼도 못했는데 둘이 같이 잘살으라고
영혼이라도 식을 올려주자고
가마 속으로 두 시신이 밀려들어간다
살아서는 알지도 만나지도 못한 영혼이
여인숙으로 들어가 나란히 꽃으로 타고 금으로 타니
베고 누울 것 없어도 되겠다
당신과 당신의 당신을 감싼 흰 보자기를 묶거나 풀 즈음
생은 몇방울 포도물로 번져도 되겠다
시취(屍臭)
이병률
이 냄새, 분명 이 냄새는
면(綿)에 슬픔을 엎지른 듯 자세를 낮추는 이 냄새는
내 것임에도 한번 물었다 놓지 못하는 냄새의 질감은
나를 훑고 있는 이 냄새는
이것이 아니면 도무지 살 일도 없을 것 같은 냄새는
계피,산초, 더덕, 뽕잎을 버무려 쪄놓은 듯
건조하고 따뜻하기조차 한 것으로 뭉쳐
생에 한번 찾아온다는 이 소요는
한번 체하면 더 이상 흘리는 일 없을 거라는 이 냄새의 사지(四肢)는
정녕 내 한 몸을 뜯어먹고 다 이해했다는 듯
저리 다 끝낸 땅에 뭔가를 심어댄단 말이냐
눈 봐라, 눈
뒷모습
왜 추운 데 서서 돌아가지 않는가
돌아갈 수 없어서가 아니라
끝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쌀로 쌀에서 고요로 사랑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어둡고 구덩이가 많아
그 차가운 존재들을 뛰어넘고 넘어서만 돌아가려 하는 것인가
추워지려는 것이다
지난봄 자고 일어난 자리에 가득 진 목련꽃잎들을 생각한 생각들이
눈길에 찍힌 작은 목숨들의 발자국이
발자국에서 빗방울로 빗방울에서 우주의 침묵으로
한통속으로 엉겨들어, 조그맣게 얼룩이라도 되어
이 천지간의 물결들을 최선들을 비벼대서
숨결이라도 일으키고 싶은 것이다
아, 돌아온다는 당신과 떠난 당신은 같은 온도인가
그사이 온통 가득한 허공을 밟고 뒤편의 뒷맛을 밟더라도
하나를 두고 하나를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한곳을 가리키며 떨리는 나침밤처럼
눈부시게 눈부시게 떨리는 뒷모습에게
그러니 벌거벗고 서 있는 뒷모습에게
왜 그리 한없이 서 있냐고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물의 말
새벽 네시나 됐을까
이마 한가운데로 한 방울 물이 떨어져 잠에서 깬다
며칠째 계속되는 비 탓에
기와도 빗물을 다 막아내지는 못하겠나보다
자리를 옮기고 냄비를 가져다 놓으니
똑 똑
잠들 만하면 떨어지고
잠들 만하면 떨어지는 빗소리가
앓는 소리를 낸다
소리를 줄이려 마른 수건을 가져다 담그자
냄비 가득 증명할 수 없는 냄새가 나고
거꾸로 누워 천장에 눈을 맞추니
꼭 내 얼굴을 닮은 얼룩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한순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시린 이미
안 풀리는 일들이 꿈으로 닥쳐온다 했는가
돌아다보고 돌아다보느라 늦게 일어나
늦은 약속에 나갔다 돌아와도
여전히 시린 이마
내가 나에게 뭐라 말을 거느라
이마 위로 떨어뜨린 그 서느런 최초의 한 방울
동유럽 종단열차
이병률
왜 혼자냐고 합니다
노부부가 호밀빵 반절을 건네며
내게 혼자여서 쓸쓸하겠다 합니다
씩씩하게 빵을 베어물며
쓸쓸함이 차창 밖 벌판에 쌓인 눈만큼이야 되겠나 싶어집니다
국경을 앞둔 루마니아 어느 작은 마을
노부부는 내리고 나는 잠이 듭니다
눈을 뜨니 바깥에는 눈보라 치는 벌판이
맞은편에는 동양 사내가 앉아 나를 보고 있습니다
긴긴 밤 말도 않던 사내가 아침이 되어서야
자신은 베트남 사람인데 나더러 일본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을 뿐 그에게 왜 혼자냐고 묻지 않습니다
대신 어디를 가느냐 물으려다 가늠할 방향이 아닌 듯해 소란을 덮어둡니다
큰 햇살이 마중나와 있는 역으로
사내는 사리지고 나는 잠이 듭니다
매서운 바람에 차창은 얼고 풍경은 닫히고
달려도 달려도 시간의 몸은 극치를 향해 있습니다
바르샤바로 가려면 이 칸에 있고
프라하로 가려면 앞칸으로 가라고 차장은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디로든 가지 않아도 됩니다
어디든 지나가도 됩니다
혼자인 것에 기대어 가고 있기에
검은 물
이병률
칼갈이 부부가 나타났다
남자가 한번, 여자가 한번 칼 갈라고 외치는 소리는
두어 번쯤 간절히 기다렸던 소리
칼갈이 부부를 불러 애써 갈 일도 없는 칼 하나를 내미는데
사내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이 들어서기엔 좁은 욕실 바닥에 나란히 앉아
칼을 갈다 멈추는 남편 손께로 물을 끼얹어주며
행여 손이라도 베일세라 시선을 떼지 않는 여인
서걱서걱 칼 가는 소리가 커피를 끓인다
칼을 갈고 나오는 부부에게 망설이던 커피를 권하자 아내가 하는 소리
이 사람은 검은 물이라고 안 먹어요
그 소리에 커피를 물리고 꿀물을 내놓으니
이 사람 검은 색밖에 몰라 그런다며,
태어나 한번도 다른 색깔을 본 적 없어 지긋지긋해한다며 남편 손에 꿀물을 쥐어준다
한번도 검다고 생각한 적 없는 그것은 검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사내의 어둠이 갈아놓은 칼에 눈을 맞추다가 눈을 베인다
집 안 가득 떠다니는 지옥들마저 베어낼 것만 같다
불을 켜지 않았다
칼갈이 부부가 집에 다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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