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퐁, 박민규, 창비, 2006
세상을 끌고 나가는 건 2%의 인간이다.
여자애들은 그보다 더하다. 원래 1910년에서 1920년 사이에 태어난 분들인데, 어째어째 한 세기가량을 매춘에 몸바쳐 일한지라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든살이 되던 순간 전재산을 쾌척, 온몸의 주름을 팽팽히 당기는 – 보지의 주름까지 – 팽팽히 당기는 초 하이테크 전신성형을 받고 빈털터리 열 다섯살 행세를 하고 있다 – 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걸레들이었다.
1910년에 빨다가 만 빨래의 냄새 같은 것이, 여자애의 다리 사이에서 심하게 풍겼다.
인간은 누구나 다수인 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
사는 걸까. 뭐가? 우리들 말이야… 이러면서… 왜 살아야 하는 걸까. 돈, 언제까지 얼마를 마련해야 한다거나, 언제까지 어떤 무엇이 되어야 하고, 말하자면 열여섯엔 고1이 되어야 한다거나… 아아, 귀찮게… 이유도 모르면서… 생활, 생활하는 거잖아.
와아 하고 다시 매미들이 울부짖었다. 탄산수는 수백 마리 매미의 울음이 용해된 듯 강하고, 쏘는 맛이었다.
이건 죽은 사촌형의 유물이야, 발로 스케이트보드를 툭 밀며 모아이가 얘기했다. 그리고 여기, 존 메이슨 전집이야. 툭, 하고 그중 한 권을 뽑은 모아이가 책을 내밀었다. <방사능 낙지>란 타이틀이 아무튼 영어로 적힌 낡은 하드커버였다. 낙지가 그려진 표지 곳곳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책은, 그래서 따뜻한 느낌이었다.
디디티가 검출된 에스키모 펭귄 이야기 아니? 디디티? 뭐, 아황상가스와 비슷한 거라 여기면 돼. 그러니까 미국의 클리어랜드란 곳에 모기를 없애려 뿌린 디디티가 생체농축과 먹이연쇄를 통해 극지까지 갔던 거야. 대단하지 않냐? 대단한데. 즉 에스키모처럼 동떨어진 인간에게도 인류의 결과가 집약될 수 있다는 거야. 너도, 그리고 나도 실은 그래서 인류의 모든 걸 지녔다고 말할 수 있지.
그래서 널 믿는 거야. 넌 자판기에서 뺀 음료수와 같은 느낌이거든.
적응이 안돼요
다들 결국엔 자기 할 말만 하는 거잖아요
얘길 들어보면 누구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어요
왜 그럴까요, 왜 아무도 틀리지 않았는데 틀린 곳으로 가는 걸까요
내가 이렇게 사는 건 누구의 책임일까요
무엇보다
그걸 용서할 수 없어요
60억이나 되는 인간들이
자신이 왜 사는지 아무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거잖아요
그걸 용서할 수가 없어요
가만히 있지 않고, 나는 울었다. 전력을 다한 말이어서 곧 허기와 외로움이 쉬이 밀려들었다.
역사란 건 스코어보드에 지나지 않아. 즉 탁구의 거대한 기록물이지.
결국엔 폼form을 완성하는 거야. 끝없이 계속 가다듬는 거지. 실은 공을 보내는 게 아니라 이쪽의 다듬은 폼을, 자세를 보내는 거야. 알겠니? 탁구에서 졌다는 말은, 결국 상대의 폼이 나의 폼보다 그 순간 더 완성되었다는 뜻이야. 자, 스매시에 있어 너의 폼이 생긴 게 언제였지? 일주일 전이요. 그럼 일주일간 가다듬은 폼이 그물을 넘어오는 거야. 그것을 내가 리씨브한다면… 좋아, 쉽게 삼십년 탁구를 쳤다 치자, 그럼 다시 말해 내가 삼십년간 가다듬은 폼이 널 리씨브하는 거야. 라켓에 닿은 공은 순식간에 일주일의 폼에서 삼십년의 폼으로 성질이 변해버리지. 그건 이동이야, 공간과 차원의 이동. 오래전 탁구가 와프와프라 불린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지. 즉 한쪽의 폼을 다른 쪽에 전이하는 수단이었던 거야. 그게 탁구의 정체야. 저편의 완성된 폼을 리씨브하면서, 또 스매시하면서 이쪽의 폼을 완성해갈 수 있는 거니까. 우주는 늘, 이런 식으로 자신의 폼을 전달해왔어.
비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병렬로, 그리고 직렬로 이어지는 빗줄기가 닿을 때마다 나는 연이어 감전되는 기분이었다.
그런가 하면 또 달라이 라마와 같은 인간은 수행중 달려드는 모기를 죽일 수 없을 때가 가장 괴로웠다고 말하는 거야. 나 참, 역시 그 정도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문제잖아.
왜 우리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을까? 왜 우리는 반드시 생존(生存)해야만 하는 걸까? 어떤 우연이 우릴 그렇게 고안한 걸까? 인체를 통해 태어나고 길러져야만 인간일까? 반드시 그래야만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
비록 볼링공과 같은 싸이즈였지만, 그건 아무래도 지구가 확실했어. 손으로 짚자 심지어 바닷물이 손바닥을 적실 정도였지.
… 할 수 없이 그는 지구를 들어올렸어. 대서양과 인도양, 태평양의 세 곳에 손가락을 끼고 그는 자세를 가다듬었지. 귀상어떼가 손가락을 무는지 중지가 따끔거렸고, 엄지 근처에선 해저화산이 폭발해 손끝이 다 얼얼한 지경이었지. 그는 볼을… 그러니까 지구를 던졌어.
모아이가 중얼거렸다. 인간의 해악(害惡)은 9볼트 정도의 전류와 같은 거야. 그것이 모여 누군가를 죽이기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거지. 그래서 다들 다수인 척하는 거야. 이탈할 하지 않고, 평형으로, 병렬로 늘어서는 거지. 그건 길게, 오래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야. 전쟁이나 학살은 그 에너지가 직렬로 이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
이해가 가냐? 백오십까지 달리게 왜 만들어놨냐고. 제한속도는 팔십으로 때리면서… 그럼 아예 오토바이를 팔십밖에 못 달리게 만들든가… 안 그냐? 안 그냐, 라고 씩씩거린 후 때렸다. 침을 뱉어가며, 때렸다. 둘러싸서, 밟았다. 나는 – 무지개를 보았다. 눈을 가고 있는데도, 보였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만 까, 죽겠다, 라고 침을 뱉듯 종모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왜, 죽이지 않는 걸까? 저런 생각까지 할 수 있게끔, 왜 만들어놨을까, 아예 죽이게끔 만들어놓든가… 안 그러냐고, 나는 뇌만을 사용해 중얼거렸다. 분하지도, 억울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나는 안타까웠다. 신은, 팔십밖에 못 달리는 오토바이를 만들었어야 했다. 위스콘신에도 휴스턴에도 없는, 신은.
운동화 세탁전문점에서 아주 예쁜 여자애를 본 적도 있었다. 여자애는 두 켤레의 스니커즈를 맡기고, 살균·항균이 끝난 한 켤레의 농구화를 찾았다. 가게 안에는 주인 아줌마와 두 명의 주부, 한무리의 여고생들이 있었는데 다들 예쁘다며 한마디씩 수군거렸다. 아니에요, 난감한 얼굴로 여자애가 자리를 떴다. 그런데 코가 좀 퍼진 느낌이지 않니? 다리도 짧은 편이야. 허리가 긴 거야 얘. 여고생들이 속닥였다. 피부가 좀 그래, 하고 두 명의 주부도 고개를 끄덕였다.
열흘 정도 못이 박힌 듯 통증이 있었고, 그 못이 빠지고 나자 한차례 비가 왔다.
이들은, 하고 세끄라탱이 다시 말을 이었다. 먹이를 주는 조건반사로 평생을 테스트당하고 길러진 존재들입니다. 삶의 대부분을 먹기 위해 공을 쳤습니다. 그것도 정확히, 원하는 조건을 달성해야만 먹이가 주어져왔습니다. 휴식시간엔 교양과목으로 티브이를 시청했습니다. 장담컨대, 힘겨운 승부가 될 것입니다. 저조차도 이들을 탁구로 이기지 못했으니까.
나는 비로소, 하나의 의견이 된 기분이었다. 실례지만 이런 의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의견입니다. 네트 너머로 공을 넘길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것은 마치 기도와 같은 것이었다.
인간이 뭐라고 생각하니? 어떤 의미에선 그렇지만 ...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어. 너희 각자의 몸속엔 세포수보다 많은 미생물이 공존하고 있으니까. 그들은 인간이 아닐까? 아님 그들을 <깜박>한 건 아닐까?
아마도
고등학생 정도로 부패한다면
지금과 같은 생각은 못할 것 같아. 내 생각도 그래.
작가의 말 중(中)
20세기에는 크나큰 전쟁이 두 번 있었다. 20세기에 인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었고, 20세기에 존 덴버와 도밍고는 <퍼햅스 러브>를 불렀고, 20세기에 나는 중학생이었다.
인류의 1교시는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나는 살아남은 한 사람의 중학생이다.
살아남았다고 해서 인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딘가에선 힘없는 인간이 맞아죽고, 어딘가에선 힘없는 민족이 폭격을 당한다. <퍼햄스 러브>와 같은 노래를 아무리 불러도, 세계의 키워드는 여전히 약육강식이다. 인류의 2교시를 생각한다면, 생존(生存)d이 아니라 잔존(殘存)이다. 지난 시간의 인간들이, 그저 잔존해 있는 것이다.
아직도
결국 자기자신과
가족과
민족을 위해 사는 척, 한다
그리고
종교를 믿으면 그만이다.
그만일까?
실은, 인류는 애당초 생존한 게 아니라 잔존해왔다. 만약 인류가 생존한 것이라면 60억 중 누구 하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대체, 왜, 살고 있는지를, 말이다. 영문도 모른 채, 말하자면 이곳에서 우리는 너무 오래 잔존해왔다.
정신이 결코 힘을 이길 수 없는 이곳에서
희생하는 인간이
이기적인 인간을 절대 당해낼 수 없는 이곳에서
이곳은 어디일까. 남아 있는 우리는
뭘까?
결국 지구의 인간은 두 종류다.
끝없이 갇혀 있는 인간과 잠시 머물러 있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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