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2007 봄 중
태양(太陽)의 자손(子孫)
오탁번
지구에서 38조 km 떨어진
프록시마 별 찾아가는 우주인처럼
어린이 명찰 하나씩 단 철부지들이
2006년 12월 28일 밤 10시 5분
정동진 행 밤기차를 탔다
우주인의 고단백 액체음식인 양
참이슬에 젖어 처음처럼 알딸딸해진
조영서 이유경 정진규 서정춘 이기철
허형만 송상욱 정숙자 정영선 최금녀의
봉숭아빛 얼굴이 미울만치 곱고
정이랑 시누이의 노래는 동치미처럼 상큼했다
방아타령하는 김찬옥의 입술이 오디같이 달고
왕방울 안경 김영찬의 코가 자두처럼 익었다
2006년 12월 29일 새벽 4시 10분
정동진역에 기차가 도착했을 때
눈깔 부리부리한 우주 경찰이 들이닥쳤다
-미성년자 음주 흡연 가무 금지법 위반이다!
전원 체포한다!
잠시 후 잠에서 깨어난 태양(太陽)이
파도치는 동해바다 위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금빛 이마를 쑥 내밀었다
-네 이놈! 내 직계자손을 몰라봐?
섭씨 백만 도로 타오르는 태양한테
앗, 뜨거! 혼쭐난 우주 경찰은
블랙홀로 다따가 빨려들어갔다
우주의 별들에게 동영상으로 생중계되는
기원후 45억 5천4백98만 2006년
12월 29일 아침 7시 42분 16초,
프록시마 별에서는 4년 후 2010년
은하수 건너 견우와 직녀별에서는
1만 5천년 후에나 생생하게 수신될
동해바다 정동진의 아침 토픽뉴스!
정동진
서정춘
내가 사랑했던
그 남자 이름 앞에
파도가 퍼질러와서 울어쌌더라
여러 번을 퍼질러와서 울어쌌더라
정동진에서
허형만
해미도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
붉은 빛 무당벌레 한 마리가
우주의 여린 가지를 붙잡고 기어오르고 있네
파도는 어느 틈에 다가와
발목을 끌어안고 떠나지 말라 하네
연결 마법사
신미균
바다를 복사해 인터넷 창에 띄우고
기치를 끌어다 붙여넣기를 했다
바다 위로 기차가 달리고 있다
파도가 꼬불꼬불 라면발이 되어 따라온다
허기진 마음에 무작정 기차를 탄다
물병자리 지나 전갈자리 지나
오리온자리의 말머리성운까지 가 보는 거다
가다 심심해지면
연결 마법사를 불러
진작에 술병 하나 들고 물병자리 옆으로
세상 떠난 그를 만나면 된다
그는 동영상으로 폴더에 잘 저장되어 있다
동영상 속의 그와 술 한 잔 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안주는
불어터진 라면이다
그는 술 한 잔을 단숨에 마시고는
잔을 머리 위로 올려 뒤집는다
술 한 방울이 눈물처럼 얼굴 위로
똑 떨어지면서
죽어도 살아있는 그가
잔을 내민다
무심코 그를 잡으려다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했다
바이러스가 침투했는지
그와 기차와 바다가 겹겹이
모니터 위로 피어나고 있다
지금은 손상된 파일들을 복구하러
모니터 밖으로 나와야 할 시간
시스템을 종료해야 한다
오류보고서는 보내지 않겠다
기다려라, 나의 기차야
작두에 올려놓은 바다
심언주
해안선을 그어 놓고
여기까지 오면
여기까지 오면
지느러밀 들춰주지
달비늘빛 살을 저며
코스 요릴 준비하지
맨발로
춤추는 여자
시퍼런 작두날에
자지러지면서
고꾸라지면서
저 여자
에이는 살풀이를
안, 간, 힘으로
당겨보지만
내 손끝엔
끊어진 해초 몇 가닥만
엉킬 뿐이지
저 여자
은갈치
밍크고래
갈매기
뭉게구름
내 혓바늘을
곤두세워 놓고
깔깔대다가
시무룩하다가
나를 당겼다가
밀었다가
북청사자놀음을
한바탕 벌여 놓지
저 여자
칼날을 갈아 끼우며
왔다가 가지
갔다가 오지
눈 내린 아침
조창환
인큐베이터 안의 팔삭둥이
선주 동생 경주는
호스를 많이 꽂고 있었다
호스들은 너무 가늘고
팔삭둥이는 너무 연해서
천사는 진땀을 흘렸다
제 땀이 호스로 흘러들어가는 것도
몰랐다
눈 위에 찍힌 새 발자국 따라
금잔화 같은 새벽이 왔다
너무 작고
쭈글쭈글하고
얼굴에 노랑꽃 핀
아기
굳은 혀로 얼음 핥으며
환해지는 하늘 쳐다보던
천사는
반짝이는 눈송이 하나에
입김을 불어넣고
제 집으로 돌아갔다
인동(忍冬)
강한 턱이 있는 하늘소는 나무속 깊이 파고들어가 웅크리고,
턱이 약한 노린재는 나무껍질 밑에 옹기종기 모여,
먼지벌레와 딱정벌레는 돌 밑에 숨어,
왕오색나비 애벌레는 마른 낙엽처럼 바람에 흔들리며,
갈구리나비 애벌레는 가시처럼 나뭇가지에 꼭 달라붙어,
물방개와 물땡땡이는 꽁꽁 언 냇물 속 낙엽이나 돌 밑에서
간신히
겨울을 난다
긴 겨울 동안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사람들은 말한다
겨울에 사라졌던 곤충들이 봄이 되면 외계에서 날아온다고
지난 가을 울며 떠난 사람이
외계에서 문자를 보내왔다, 봄비, 봄비
차를 마실 때는
너무 빨리 마시지 말게.
머금게.
- 강은교 시인의 시작노트 중(中)
저녁놀
윤동재
일요일 오후
아버지와 깨밭을 매다 보니
어느덧 산 위에
빠알간
저녁놀이 걸려 있었다.
- 아, 우예 저래 이쁠꼬?
“아부지에, 저녁 놀 한번 보이소.”
“아야, 알았다마.
해 얼마 안 남았데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백로 두 마리
저녁놀을 비껴가고 있었다.
희망원의 느티나무
윤동재
희망원 앞마당의
느티나무 두 그루
오늘은 서로 어떤 약속을 했는지
슬픔을 먹고 사는 아이
외로움을 먹고 사는 아이
무릎 아래 모아 놓고
진종일
손을 잡아 주다가
가슴을 어루만져 주다가
뺨을 비비다가
해질 무렵엔 어쩔 수 없이
눈시울이 빨갛게 젖고 있다.
기획 연재 - 김행숙이 만난 시인 이수명
그녀의 산문(인터넷에서 읽은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이것은 어떤 문학상 수상소감이었다)을 인용한다….
… 이질감은 동질감을 파괴하지 않지만, 동질감은 이질감을 파괴한다. 동질감이란 구속적이다. 그러면서도 개성을 견디지 못하는 사회란 얼마나 허약한가?
시는 동질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질감을 위해서 존재한다. 시는 지속적으로 동류화 되는 우리 삶에 날아드는 이물질이다. 그것은 우리의 맞은편에 섬으로써 우리들 스스로 우리들 맞은편에 서게 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마주함으로써 묻혀 있던 우리들을 볼 수 있게 되고, 세계를 인식하게 된다. 세계는 비로소 돌출한다. 세계는 함몰에 있지 않다. 그것은 갈라지는, 튀어나오는 어떤 것이다. 시는 세계를 세계로 만들어준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시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동의한다는 것은 반대한다는 것보다 더 미묘한 일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동의가 동의되는 대상에 플러스 알파적 요소를 보태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이물질을 전제한 동의가 아니라면, 그 동의는 그룹을 만드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동의는 빈손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동의가 아름다운 것은 동의하면서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이 확장이 위험할수록 그것은 더 아름답다. 동의함으로써 애초의 단계를 파괴해버리고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 예기치 못한 이러한 전환이야말로 동의가 의미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라면 시는 한편으로 세계에 대한 진정한 동의라 할 수 있다….
이수명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시를 쓰는 일은 무엇을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혹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눈앞에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 사물들, 현실의 이름들을 거부하고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기를 계속해야 한다. 그들과의 밀착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들과의 사이에 틈을 만들어야 한다. 일종의 공황상태다. 의식은 마비 상태에 가까운 무력증을 드러내고, 두뇌는 기능을 잃은 듯이 여겨진다. 가진 것을 잃은 것이다. 이는 지각, 감각, 기억, 연상 등을 잃고 사라져버리는 일이다. 정신이 무장 해제되는 것, 바로 이것이 시의 토대이다.
무장 해제된 정신이란 정신의 자유로움을 뜻한다. 시는 정신이 거느렸던 기존의 무기를 버리고 무기의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그리고 자유로움은 그 자체가 새로운 무기이다…. 앞에 서서 흔들어 버리는 것, 정신의 전위, 이것이 시의 토대이다.
돌 하나를 집어 드니
이명윤
한쪽 모서리가 깨어져 있다
돌보다 더 단단한 힘이 다녀갔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어디론가 발설되었을 이력을 더듬는다
옛날 옛적 어느 추장의 돌도끼였나
날카로운 이빨이 만져진다
바람처럼 날던 날개가 보인다
어느 시골집 돌담이 되어
서느런 달빛에 몸을 적셨나
달빛 무늬 박힌
헤아릴 수 없는 날들
바위였다가, 돌덩이였다가, 돌멩이가 된
네가 걸어온 길을 생각한다
다시 입 다문 침묵
또 얼마큼의 세월을 달려 갈 것인가
너는 끝내 남겨지고 나는 사라질 것이다
두려운 느낌이 드는 순간
돌이 어느새 나를 던져 버리고
저만치 제 갈 길을 간다
벌초
이명윤
시간은 복사기 불빛처럼 스치고 달아나요
A4용지처럼 아스라이 쌓여가는 일상을 뒤로 하고
오늘은 아버지, 당신에게 가는 날
어머니는 아버지 머리 깎는 날이라 하시고 아내는
스케줄에 의한 세 번째 집안행사라고 하지요
망자의 침묵도 아랑곳없이 여기저기 무성히 내민 손들을
저는요 아버지 근심이라 생각할게요
오랜 세월 지났어도 안부처럼 자라나는
그래요, 아버지 근심 들어드리려고 왔어요
아가, 너희들 근심이나 밑동을 치려무나
제초기로 대출이자나 싹둑 자르거라
그렇군요 낼 모레가 또 대목이네요
왜 바람은 빈 호주머니부터 더듬을까요
근심은 잡초보다 빨리 우거져요
수풀 속에서 나비 한 마리 날아올라요
우리 기억은 너울너울 가벼워지고 있나요
거미줄에 걸린 저 벌레
기억상실증에 걸린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네요
죄송해요 아버지, 오래 있진 못하겠어요
저기 길이 한숨처럼 뱉어내는 긴 행렬을 보세요
집으로 오는 길
가지 끝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백일홍을 보았어요
쉬이 잠들지 않는 바람에
고장 난 시계추처럼 머리를 흔들며 앞다투어
가을을 넘고 있었어요
캥거루 가죽 모자
- 수피아
캥거루 가죽이 다리를 흔들며 수선집에 갔다
해질 무렵 야라 강변을 떠올리기에 좋은
잔디구름 펼쳐진 하늘을 밟고 갔다
캥거루 가죽이 초원에서
남대문 시장으로 대 이동 할 때는
세일로 불티나게 모자가 팔렸을 때다
미싱에 박히는 날에는 층층이 쌓아 올려져
말 타기 게임을 즐겼다
말이 된 친구의 등은 야생의 숲이어서 진한 박하향기가 났고,
달리다가 엉덩이에 손 짚고 올라타면
허리는 흔들리는 그물침대가 됐다
말이 된 친구에게는 혹독한 놀이였음을 깨닫기에는 너무 어렸다
남대문 시장 567번 가게에 들러 앞 다리를 수선했다
수선될 수 있는 상처는 쉽게 아물기도 하지만
14살에 이름을 버린 친구는 튿어진 상처로 남아
내 육아낭 속에서 오래도록 서러워했다
남대문 시장 수선집들을 다 돌아 다녀도
오래된 상처는 수선이 불가능합니다 라는 답변 듣던 날
캥거루 가죽은 다리를 흔들며 은하수를 밟았다
밤 몇 시간쯤은 상처를 가려놓고
어둠은 크라운카지노*를 반짝거렸다
* 크라운 카지노(Crown Casino) : 호주에서는 물론 남반구 최대의 카지노입니다
돼지부속 집
이영식
폐차장 근처 돼지부속 집에 모인 사람들
미션과 삼발이, 얼라이먼트, 캬브레타, 엔진…
폐차의 주검을 수습하던 손으로 소주잔을 돌린다
막창, 오소리감투, 갈매기살, 껍데기, 쌍방울…
돼지부속 안주 삼아 한 저녁을 건너고 있다
아줌씨 저 쌍방울이 뭐시당가요?
비뚤비뚤 기어간 메뉴판 글발 놓고 던진 농지거리에
아그야, 넌 불알도 모르것냐?
어구 저 씨부랄 놈, 너그 집 죽은 시계불알이다
기름때 절은 손으로 봄똥에 쌈장을 쳐바르던 사내
돼지껍데기 뒤집듯 다시 한 번 지글거리는데
아줌씨 갈매기살이나 쌔려묵고 바다로 날아가볼까?
저런 우라질 놈 생지랄하고 자빠졌네
오소리감투 처먹고 목이나 콱 막혀 뒈져부러라!
욕지거리도 매양 듣다보면 헛배가 부르는지
그래 이왕지사 욕질판에 감투나 한 자리 써보자고
오소리감투를 불판 위에 한 움큼 올려보는데
욕쟁이 아줌씨 뭇방치기로 한 마디 더 쏘아댄다
이눔아 난 오늘 새벽에도 돼지머리에 절 한 자리 올렸다
니놈들도 돼지꽁무니에 대가리라도 한번 박아봐라
불쑥 내민 홍두께에 소주잔 꺾던 손이 뜨악해지는데
야들아 오늘 우리 몇 대나 작살내브렀냐?
오십 대냐? 백 대냐? 나는 누구의 부속(附屬)이었다냐?
기름밥 먹는 우리 몸속의 부속들은 안녕하시당가?
가슴에서 불알까지 손더듬이로 쓸어보는 사이
돼지부속집 금간 유리창에는
오소리털벙거지 뒤집어쓴 고향 눈이 누덕누덕
어둠을 깁고 들어서는 것이렸다.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년보다 긴 하루 - 친기즈 아이뜨마또프 (0) | 2007.04.12 |
---|---|
네스카페 카피, 좋은 아침입니다 (0) | 2007.04.11 |
새댁 요코짱의 한국살이 - 타카미 요코 (0) | 2007.04.04 |
게 눈 속의 연꽃 - 황지우 (0) | 2007.04.03 |
카피 혹은 아이디어를 위한 메타포, 윤준호 (0) | 2007.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