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역사
내가 치매에 걸린다면
나는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쓰게 될까
방바닥이며 벽마다
케찹이나 김치국물로 글씨 같지도 않은
바이올린을 뭉개놓은 것 같은 글씨로
시나 30년 전의 일기나
엄마나 아버지를 적고 있을까
어머니는 몸이 먼저 아프고
다음에 치매가 왔다
치매가 먼저 오고
몸이 멀쩡했다면 어디 가서 무얼 하다
붙들려 오고 붙들려 오고 아들 손에 붙들려 왔을까
다리가 풀려 일어서지 못하던 어머니는
방바닥을 훔치고 방바닥을 훔치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누구 말마따나
한국에 양반가문 아닌 사람 없는 건
대체 어찌된 일일까
하나같이 치매현상에, 공감각적 기억의 소유자로,
묽은 똥 바닥에 문질러 가며
역사를 쓰고 빨아먹고 그랬던 걸까
새삼
쌍놈 같은 양반가문에 시집온 우리 엄마의
처녀 적 꿈이 보고 싶어진다
외가와 친가를 동시에 타고 흐르는
치매의 역사가 가문의 역사라면
옛 무덤 파해 치며
처음 본 조상 사촌이며 삼촌들께 인사 드리기 보다
읽을 줄 모르는 한자 족보 한 질의 무게보다
좀 더 나은 걸 남겨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처녀 적 엄마의 꿈이 보고 싶어진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 방학 때
면목동 동부시장에서 엄마가 사준 반짝거리는 은색 점퍼를
동생과 내가 맞춰 입었고
고3 여름 방학 때
작은아버지 투탕카멘 양복점에서 외할머니 장례식용 검정 양복을
동생과 내가 맞춰 입었고
스물 여덟 살에는
구로에 있는 아울렛 쇼핑몰에 가서 어머니 장례용 상복을
동생과 내가 맞춰 사 입었다
훗날, 방바닥이나 병실에
파리와 사람의 교배종인
파리인간처럼 앉아서
긴 얘기를 조금씩 잘라먹어가며
먹을 것이 다 떨어질 때까지
살아가게 될까
나는 늘 시를 길게 거짓으로 쓴다
이 모든게 짧아질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