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알약, 프레데릭 페테르스, ;세미콜론, 2007
난 지금 약간 학구파로 보이는 한 삼십대 남자를 떠올리고 있다. 그는 세 가닥 새치머리에 청록색 안경을 끼고 3일 동안 깎지 않은 수염을 긁적이며 내게 이렇게 말한다.
“알다시피… 결국 뉴욕도 작은 마을이나 마찬가지예요….”
“음…, 그럼 제네바를 한번 상상해봐요!”
“거기서 25년을 산대 해도, 친숙한 얼굴들 가운데 여전히 낯선 이들이 있다는 게 정말 의아스러울 겁니다. 아마 도시는 영원히 낯선 이들을 만들어낼 거예요….”
“천천히 살아 숨 쉬는 가운데 말이죠.”
멜로디에다 셈여림표, 쉼표를 찍어가며 악보를 써내려가듯, 그녀는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건 처음 듣는 곡이었지만 왠지 내 귀엔 익숙하게 들렸다.
어떤 사람들의 인생에서는 삶의 소유권이 낯선 의사들의 손에 너무 수비게 양도되어 버린다. 이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울 따름이다. 단지 과학적 지식을 합법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신뢰해야 하다니….
“아찌도 봤어? 왜… 왜 코끼리들은 저렇게 생쥐를 무서워해?”
난 아이들의 짧고 단순한 질문들을 아주 좋아한다.
싸구려 �누 조의 긴 대답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말이지, 생쥐가 너무 작아서 그래. 사람들은 가끔 너무 작거나 안 보이는 것들을 두려워해. 이것들이 꼭 자기를 해칠 것처럼 느껴지거든. 알겠니?”
획기적인 치료제가 발견되지 않는 한, 아이는 엄마의 관리 아래, 이를 테면 약물 중독 상태에서 죽는 날까지 목숨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여기엔 오직 눈물과 의문만 있을 뿐, 다른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날 좋아하는 거야?”
“횡단보도를 건널 때, 당신이 온 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크루아상 냄새를 맡는 모습도 보기 좋고….”
내가 왜 줄곧 의사들을 불신해왔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물론 내가 게으르고 불쾌한 의사들 한두 명을 봐왔던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게 이유가 될 순 없다. 내가 보기에 이건 권력의 문제인 것 같다.
의사들과의 관계에서 사람들은 종종 이들의 처분을 바라고 기다리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의사들이 특권을 누리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생명의 일부를 이들의 손에 맡기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들이 우리 스스로는 접근할 수 없는 각도에서 우리를 살펴볼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페테르스 씨가 에이즈에 걸릴 가능성은, 이 방을 나갔을 때 흰 코뿔소와 마주칠 가능성 쯤으로 보시면 되겠네요. 하하하하”
“시내에 서커스단이 온 건 아니지? 그렇지?”
사실 콘돔을 사용하는 게 자연스럽진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바이러스의 침투를 예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결국 하나의 의식이 되어버렸다. 한편으론 우습고 또 한편으론 느긋하기도 하고 성급하기도 한, 일종의 종교적인 의식, 마치 성전 입구에서 반드시 신발을 벗는 이슬람교도들처럼.
반드시 거쳐야 할 규정 연기가 있다는 사실은 다른 모든 장애물들을 훌쩍 뛰어넘게 했다. 이제 우리는 주어진 권리를 최대한 이용해 모든 연기를 시도해봐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대체 과학에 대해 뭐가 불만이야?”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에이즈에 걸렸어. 그 아들도!”
“그건 불평거리가 못 돼!”
“과학은 이들을 격리시켰단 말이야! 표지를 하고, 별도로 이름까지 붙여서!”
“과학은 이름을 붙였을 뿐이야! 격리시킨 건 바로 사회라고!”
“그럼 과학은 왜 이름을 붙였지?”
“더 잘 보살피려고.”
““세상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길 바라지 말라. 그저 되어가는 대로 받아들여라.” 에픽테투스의 말씀이야.”
“에픽테투스는 에이즈가 아니었어.”
“그게 결론이야? 하하. 결국 다 운에 달렸다는 거지?!”
“꼭 그렇진 않아. 운이란 바로 자네가 찾아야 하는 거니까.”
“쳇…!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야? 찾고 또 찾고, 돌고 또 돌고 그러다 겨국 나 자신마저 잃게 되는 거지! 남는 건 그것뿐이야!”
“”뭔가를 발견하려면 종종 자신을 잃어버려야 한다.””
“이번엔 또 누구야?”
“뭐라고?”
“누가 한 말이냐고.”
“아아…음… 버트 레이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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