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웃는다, 유홍준, 창비, 2007

 

 

 

 

 

 

 

다방에 관한 보고서

                         

 

 우리나라 다방은 18,536개이다 우리나라 다방 종업원은 29,459명이다 오후 3시 38분 현재, 커피를 주문하는 인간은 5,047명이고 배달 가는 오토바이와 티코는 935대이다 지금 3급 카쎈터 더러운 쏘파에서 배달 나온 다방레지의 젖을 만지는 놈은 2.304명 팁을 받으려고 치마를 걷어올린 년은 576명이다 시간당 3만원 하는 티켓을 흥정하는 자가 483명 여관까지 가는 2차를 행차중인 자가 885명이다 여관비+티켓비=? 돈 계산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겠지 하는 아빠가 222명 좀 돌려봐 이년아 엉덩이 끌어당기는 여보가 333명 이 새끼 이거 순 변태 아냐! 개의 뺨을 올려붙이며 욕지거리를 퍼붓는 이브가 73명이다 나들이 열 번으로 금목걸이를 해 건 공주가 4,747명 엄마 별일 없죠? 네에 저도 직장 잘 다니고 있어요 그럼요 걱정 마세요 타락천사가 1,906명 오늘 보건소 가야 하는 백설공주가 5,401명이다 지금 공주의 썩은 가랑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보건의는 152명 오늘 은퇴하는 왕비가 84면 새로 입궐하는 궁녀가 157명이다 정말로 굉장한, 이 나라의 행사다

 

 

 

 

 

 

수평선

 

 

막막하다, 가늘고 길다

 

어떤 굵은 목숨의 모가지라도

 

목매달 수 있겠다

 

질기디질긴

 

이 명줄

 

끊어버릴 수 있겠다

 

봐라 저 수평선 한 토막 잘라 머리 동여매고 한 사흘

 

이 무거운 머리 밑에 아주 작은 섬 하나 고쳐 베고

 

나 이렇게 즐겁게 앓아누울 수 있겠다

 

이것이 정말 죽었나

 

살았나

 

이름 모르는 조개들

 

내 얼굴에 달라붙어 살점을 파먹어도 뜯어먹어도

 

 

 

 

(나는 이 시를 처음에, 수평선을 잘라 이마에 두르는 것이 아니라, 목에 두르는 것으로 잘못 읽었다. 그런데 수평선이라는 아늑하고 아득하고 파랗고 퍼렇고 알랑거리는 그걸 목에두른다는 상상을 하니 너무 무섭고 기분이 좋아서 오랜만에 책에 낙서를 하게되었다. 다시 읽어보니 수평선을 목에 두르는 게 아니라 아픈 사람 이마에 물수건을 올리듯이 머리에 두르는 것이었고 그것도 무척 좋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림은 이미 수평선을 목에 두르는 것으로 그렸다. 그건 정말 멋진 일이고 상상속에서만 가능한 체험이다.- melt)

 

 

 

 

 

야교

 

 

내 아버지의 종교는 아교,

하루도 아니고

연사흘 궂은 비가 내리면

아버지는 선반 위의 아교를 내리고

불 피워 그것을 녹이셨네 세심하게

꼼꼼하게 느리게 낡은 런닝구 입고 마루 끝에 앉아

개다리소반 다리를 붙이셨다네

술 취해 돌아와 어머니랑 싸우다가

집어던진 개다리소반……

살점 떨어져나간 무릎이며 복사뼈며

어깻죽지를 감쪽같이 붙이시던 아버지, 감쪽같이

자신의 과오를 수습하던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 내 아버지의 종교는 아교!

세심하게 꼼꼼하게 개다리소반을 수리하시던

아교의 교주 아버지 보고 싶네

내 뿔테안경 내 플라스틱 명찰 붙여주시던

아버지 만나 나도 이제 개종을 하고 싶다 말하고 싶네

아버지의 아교도가 되어

추적추적 비가 오는 아교도의 주일날

정확히 무언지도 모를 나의 무언가를 감쪽같이 붙이고 싶네

 

 

 

 

 

 

어머니 독에 갇혀 우시네

 

 

어머니 커다란 독에 갇혀

우시네 엉덩이가 펑퍼짐한 어머니

텅 빈 독 속에 갇혀 우시네

똬리 틀고 들어앉아

우시네 자식을 일곱이나 낳은

어머니 아랫배가 홀쪽한 어머니

배암으로 우시네 두꺼비로 우시네

마른 바람의 혓바닥으로 우시네

텅 텅 독을 빠져나갈 수가 없어서

텅 텅 텅 텅 빈 독 두드리며 우시네

속절없이 먼 하늘 바라보며 우시네

일흔살 어머니 두드리면

댕그랑 댕그랑 맑은 울음 우는 빈 독

, 손마디로 두드리며 묻네

 

간장 같은 된장 같은 어머니, 거기 계셔요?

 

 

 

 

 

빌어먹을 동백꽃

 

 

  동백꽃 한 송이가 툭 떨어집니다 위층 사는 백수가 동백이파리 같은 피크를 쥐고 뚱땅뚱땅 기타줄을 퉁길 때 동백꽃 한 송이가 툭 떨어집니다 막 이혼한 여자가 옷가지를 챙겨 덜덜덜덜 가방을 끌고 지나갈 때 동백꽃 한 송이가 툭 떨어집니다 209동 경비아저씨의 졸음이 무겁고도 무거운 머리통을 떨어뜨릴 때 동백꽃 한 송이가 툭 떨어집니다 끼이익, 어디선가 다급하게 브레이크 밟는 소리 들릴 때 동백꽃 한 송이가 툭 떨어집니다 아날로그 시곗바늘 세 개가 잠시 정오에 모였다가 째까닥 떨어질 때 동백꽃 한 송이가 툭 떨어집니다 앞치마 두른 내 여자가 분리수거통을 열고 음식물쓰레기를 쏟아부을 때 동백꽃 한 송이가 툭 떨어집니다 지랄하고는 허리가 부러졌나, 하루종일 드러누워 지내는 니트족 내 아들놈이 리모컨을 돌릴 때 떨어집니다 채널이 바뀔 때마다 떨어집니다 화면이 바뀔 때마다 떨어집니다 동백꽃 한 송이가 툭 떨어집니다 에라 이 빌어먹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팔만대장족경

 

 

고향집 장독대에

이제는 다 채울 일 사라져버린 서 말가웃 장독 하나가 있다

 

흘러내린 바지춤을 스윽 끌어올리듯 무심코 난초 잎을 그려넣은

장독 앞에서 팔만개의 족적을 본다

반죽을 다지고 또 다졌을 팔만개의

발자국소리를 듣는다

 

누가 한 덩어리 흙 위에

저만한 발자국을 남겨

제 발자국을 똘똘 뭉쳐 독을 짓는단 말인가

 

천도가 넘는 가마 속에서

발갛게 달아올랐을

발자국이여

뒤꿈치여

 

단 한번이라도

저 독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면 나는

대시인이 됐을지도 몰라

 

간장이 익어 나오는 걸 봐

부정(不正)이라고 못 익히겠어 천벌이라고 못 익히겠어

 

콧물 훔치듯 난초 잎을 올려 친

팔만대장, 족경이여

 

 

 

 

 

 

 

 

기계는 기예의 염주 베어링을 돌린다

 

 

저 산중 절간

두 눈 질끈 감은 스님은

좌정하고 염주 돌리며 무어라 무어라 중얼거리고

저 고요한 성당

미사포 쓴 수녀님은 하염없이 고개 처박고

묵주 돌리며 로사리오 기도를 올리지만

내가 다니는 종이공장

제지기계는

베어링을 돌린다

스님보다도 오래, 수녀님보다도 더 끈질기게

기계는 기계의 염주 베어링을 돌리며 용맹정진을 한다

소음이라 부르는 기계의 염불 소음송(騷音頌)을 외우며

오직 한 길 생산도(生産道)를 닦는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내가 믿는 건 이 공장 이 기계의 크신 능력뿐,

오늘도 나는 푸른 생산도복을 입고

닦고 조이고 기름 치나니

일용할 양식 내리시는 기계신 앞에

 

 

 

 

 

 

 

벚꽃나무

 

 

  추리닝 입고 낡은 운동화 구겨 신고 마트에 갔다 온다 짧은 봄날이 이렇게 무단횡단으로 지나간다 까짓 무단이라는 거 뭐, 별것 아니지 싶다 봄이 지나가는 아파트단지 만개한 벚꽃나무를 보면 나는 발로 걷어차고 싶어진다 화르르화르르 꽃잎들이 날린다 아름답다 무심한 발바닥도 더러는 죄 지을 때가 있다 머리끝 생각이 어떤 경로를 따라 발바닥까지 전달되는지…… 그런 거 관심 없다 굳이 알 필요 없다 그동안 내가 배운 것은 깡그리 다 엉터리, 그저 만개한 벚꽃나무를 보면 나는 걷어차고 싶어진다 쎄일로 파는 다섯 개들이 라면 한 봉지를 사서 들고 허적허적 돌아가는 길, 내 한쪽 손 잡은 딸아이가 재밌어서 즐거워서 자꾸만 한번 더 걷어차보라고 한다 한번 더

 

 

 

 

 

 

북천

 

 

구름 같은 까마귀떼 저 하늘을 쪼았다 뱉는다 하늘밖에 더 뜯어먹을 게 없는

 

눈뜨지 마라 파먹을라 동안거에 들어간 하늘의 얼굴이 산비탈처럼 말랐다 두 볼에 골짜기가 패었다 하늘 눈(目)에서 피가 흐른다 서산마루를 타고 흘러내린다

 

주둥이마다 피를 묻힌 까마귀들이 앞산 넘어간다 금방, 캄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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