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철학 논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책세상, 2006
이 책은 아마 이 책 속에 표현된 사고들을 – 또는 어쨌든 비슷한 사고들을 – 스스로 이미 언젠가 해본 사람만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 이 책은 그러므로 교과서가 아니다. – 이 책의 목적은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어떤 이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달성될 것이다.
대상이 사태들 속에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대상의 형식이다.
현실 세계와 아무리 상이하게 생각된 세계조차도 현실 세계와 어떤 것-형식-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는 비논리적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비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찍이, 논리 법칙에 어긋나는 것만 제외한다면 신(神)은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노라고 말했다. – 요컨대 우리는 “비논리적” 세계에 관해서는 그 세계가 어떻게 보일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논리와 모순되는” 어떤 것을 언어에서 묘사할 수 없는 것은 기하학에서 공간 법칙들과 모순되는 도형을 좌표로 묘사할 수 없는 것과, 또는 존재하지 않는 점의 좌표를 제시할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이다.
명제에는 투영에 속하는 모든 것이 속한다; 그러나 투영된 것은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투영된 것의 가능성은 속하지만, 이 투영된 것 자체는 속하지 않는다.
명제 속에는 그러므로 명제의 뜻을 표현할 가능성은 포함되어 있지만, 명제의 뜻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명제의 내용”은 뜻이 있는 명제의 내용을 말한다.)
명제 속에는 그 뜻의 형식은 포함되어 있으나, 그 뜻의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명제 기호는 그 요소들, 즉 낱말들이 그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 데 있다.
명제 기호는 하나의 사실이다.
오직 사실들만이 뜻을 표현할 수 있고, 이름들의 집합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명제 기호가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은 글씨 또는 인쇄의 통상적인 표현 형식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
왜냐하면 예컨대 인쇄된 명제에서 명제 기호는 낱말과 본질적으로 상이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복합적 시호 ‘aRb’가 a는 b에 대해 R이라는 관계에 있음을 말한다”가 아니라, “a”가 “b”에 대해 어떤 관계에 있다는 것이 aRb임을 말한다.
상황들은 기술될 수는 있으나 명명될 수는 없다.
대상들은 단지 명명될 수 있을 뿐이다. 기호들은 그것들을 대표한다. 나는 대상들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을 뿐, 대상들을 언표할 수는 없다. 명제는 사물이 어떻게 있는가를 말할 수 있을 뿐, 사물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는 없다.
모든 정의된 기호는 그것을 정의한 기호들을 거쳐서 지칭한다; 그리고 정의들은 그 길을 가르쳐 준다.
원초 기호와 원초 기호에 의해 정의된 기호, 이 두 기호는 동일한 방식으로 지칭할 수 없다. 이름들은 정의들에 의해 분해될 수 없다.
명제 변항 값들의 규정은 그 변항을 공통의 표지로 가지는 명제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이것, 즉 그 규정은 상징들에 관한 기술일 뿐 그 상징들에 의해 지칭된 것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진술하지 않는다는 것만이 그 규정에 본질적이다.
어떤 명제도 자기 자신에 관해 무엇인가를 진술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명제 기호는 자기 자신 속에 포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표기법에는 자의적인 어떤 것도 있지만, 그러나 만일 우리가 어떤 것을 자의적으로 확정했다면 다른 어떤 것은 사실이어야 한다는 이것은 자의적이지 않다.
적용된, 생각된 명제 기호가 사고이다.
인간은 각각의 낱말이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이 각각의 뜻이 모두 표현될 수 있게 하는 언어들을 구성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 우리들이 개별적인 소리들이 어떻게 산출되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말을 하듯이 말이다.
철학적인 것들에 관해 씌어진 대부분의 명제들과 물음들은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하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런 종류의 물음들에 대해 결코 대답할 수 없고, 다만 그것들의 무의미성을 확립할 수 있을 뿐이다.
명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상형 문자를 생각해 보자. 상형 문자는 그것이 기술하는 사실들을 모사한다. 그리고 표음 문자는 상형 문자로부터 모사의 본질이 상실됨이 없이 생겨났다.
“이 명제는 이러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대신, 우리들은 곧바로 “이 명제는 이러이러한 상황을 묘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의 근본 사상은, “논리적 상항들”은 대표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즉 사실들의 논리는 대표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점이 검다거나 희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나는 우선 언제 우리들이 한 점을 검다고 부르며, 언제 우리들이 한 점을 희다고 부르는지 알아야 한다. 즉 “p”는 참이다(또는 거짓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나는 내가 어떤 환경 속에서 “p”를 참이라고 부르는지 확정해야 하며, 이로써 나는 그 명제의 뜻을 확정한다.
그런데 우리의 비유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는 적절하지 않다. 즉 우리는 희다는 게 무엇이며 검다는 게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서도 종이 위의 한 점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러나 뜻이 없는 명제에는 아무것도 대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령 “참” 또는 “거짓”이라 불리는 속성을 지니는 어떤 것(진리치)을 지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제의 동사는-프레게가 믿은 것처럼-“참이다”나 “거짓이다”가 아니다. 오히려, “참인” 것은 이미 동사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모든 명제는 이미 뜻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철학의 목적은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이다.
철학은 교설(敎說)이 아니라 활동이다.
철학적 작업은 본질적으로 주해들로 이루어진다.
철학의 결과는 “철학적 명제들”이 아니라, 명제들이 명료해짐이다.
철학은 말하자면 흐리고 몽롱한 사고들을 명료하게 하고 명확하게 구분 지어야 한다.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료하게 묘사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도대체 생각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명료하게 생각될 수 있다. 언표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명료하게 언표될 수 있다.
언어에서 표현되는 것을 우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a=b” 형식의 표현들은 단지 묘사의 미봉책일 뿐이다; 그것들은 기호 “a”, “b”의 의미에 관해서 아무것도 진술하지 않는다.
명제는 자기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보여 주는데, 동어 반복과 모순은 자기들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동어 반복은 아무런 진리 조건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조건 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순은 어떠한 조건에서도 참이 아니다.
동어 반복과 모순은 뜻이 없다.
우리는 미래의 사건들을 현재의 사건들로부터 추론할 수 없다.
인과 관계에 대한 믿음은 미신이다.
의지의 자유는 미래의 행위들이 지금 알려질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인과성이 논리적 추론의 필연성과 같이 내적 필연성일 경우에만 우리는 미래의 행위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이중부정을 통해 긍정이 산출될 수 있다면, 부정-어떤 의미에서건-은 긍정 속에 포함되어 있는가? “~~p”는 ~p를 부정하는가, 아니면 p를 긍정하는가; 또는 양쪽 다인가?
명제 “~~p”는 부정을 대상을 취급하듯 취급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부정의 가능성은 긍정 속에 이미 선결되어 있다.
그리고 만일 “~”이라고 불리는 대상이 존재한다면, “~~p”는 “p”와는 다른 어떤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전자는 ~을 다루는데, 후자는 그것을 다루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어떤 명제가 하나 주어져 있다면, 그것과 함께 그것을 토대로 삼고 있는 모든 진리 연산의 결과들도 이미 주어져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 대답들이-선천적으로-대칭을 이루고 있고 하나의 완결된 규칙적 구성물을 이루도록 통합되어 있는 물음들의 영역이 존재해야 한다고 예감해 왔다.
“단순성은 진리의 징표이다”라는 명제가 적용되는 영역.
대충 말해서, 두 개의 사물에 관하여 그 둘이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사물에 관하여 그것이 그 자체와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아무것도 말하는 바가 없다.
나의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한다.
논리는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 세계의 한계들은 또한 논리의 한계들이기도 하다.
우리가 생각 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도 없다.
나는 나의 세계이다.(소우주.)
생각하고 표상하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내가 발견한 대로의 세계”라는 책을 쓴다면, 그 속에는 나의 몸에 관해서도 보고하고, 어느 부분들이 나의 의지에 종속되고 어느 부분들이 종속되지 않는지 따위도 말해져야 할 터인데, 요컨대 이것이 주체를 격리시키는 한 방법이다’ 또는 오히려, 어떤 중요한 뜻에서 주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그것만이 이 책에서 이야기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세계의 한계이다.
세계 속 어디에서 형이상학적 주체가 발견될 수 있는가?
당신은 여기서 사정은 눈과 시야의 관계와 전적으로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은 실제로 눈을 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시야 속에 있는 어떤 것도, 그것을 어떤 눈이 보고 있다는 추론을 허용하지 않는다.
철학적 자아는 인간이 아니며, 인간 신체가 아니며, 또는 심리학이 다루는 인간 영혼도 아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주체, 세계의 한계-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이다.
일반적이라는 것은 실은 단지 모든 사물들에 대해 우연히 적용된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일반화되지 않은 명제도 일반화된 명제와 꼭 같이 동어 반복적일 수 있다.
논리학이 우리의 세계가 실제로 그러한가 또는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물음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논리적 명제들은 세계의 골격을 기술한다; 또는 차라리, 세계의 골격을 묘사한다.
마찬가지로, 세계가 뉴턴 역학에 의해 기술될 수 있다는 것도 세계에 관해 아무것도 진술하는 바가 없다; 그렇지만 세계가 뉴턴 역학에 의해 그렇게 기술될 수 있다는 것, 이는 분명 사실이거니와, 이것은 세계에 관해 무엇인가를 진술해 준다. 또한 세계가 다른 역학들보다 그 한 역학에 의해 더 단순하게 기술될 수 있다는 것도 역시 세계에 관해 뭔가를 말해 준다.
역학은 우리가 세계 기술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참된 명제들을 단일한 계획에 따라 구성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귀납의 과정은 우리가 우리의 경험들과 조화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법칙을 받아들인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은 논리적이 아닌 단지 심리적인 정초를 가질 뿐이다.
이제 가장 단순한 경우가 실제로도 발생할 것이라고 믿을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태양이 내일 떠오르리라는 것은 하나의 가설이다; 그리고 이는 태양이 떠오를지 여부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계는 나의 의지로부터 독립적이다.
필연성은 오직 논리적 필연성만이 존재하듯이, 불가능성도 오직 논리적 불가능성만이 존재한다.
세계의 뜻은 세계 밖에 놓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으며, 모든 것은 일어나는 그대로 일어난다; 세계 속에는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윤리학은 선험적이다.
(윤리학가 미학은 하나이다.)
“당신은 ……해야 한다”라는 형식의 윤리 법칙이 세워졌을 때 드는 최초의 생각은,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지?” 하는 것이다.
선하거나 악한 의지가 세계를 바꾼다면, 그것은 단지 세계의 한계들을 바꿀 수 있을 뿐이지, 사실들을 바꿀 수는 없다. 즉 언어에 의해서 표현될 수 있는 것을 바꿀 수는 없다.
행복한 자의 세계는 불행한 자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이다.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죽음은 체험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시야가 한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다.
인간 영혼의 시간적 불멸성, 즉 죽음 이후에도 인간 영혼이 영원한 삶을 계속한다는 가정은 어떤 방식으로도 보증되어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 가정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늘 그런 가정으로 달성하고자 한 것을 전혀 성취하지 못한다. 내가 영원히 산다는 것에 의해 도대체 수수께끼가 풀리는가? 도대체 이 영원한 삶이란 현재의 삶과 똑같이 수수께끼 같지 않은가?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은 공간과 시간 밖에 놓여 있다.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는 더 높은 존재에게는 완전히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신은 자신을 세계 속에서 드러내지 않는다.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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