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의 즐거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해냄, 2006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고독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다. 고독을 향유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도 있지만,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은 아주 드물다.

 

 

 

·벌레·악취·암흑에 우리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지는 이유는 진화 과정에서 이것들이 인간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였기 때문이리라.

 

 

 

행복은 우리에게 뭔가를 가져다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기에 우리의 추구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자발적일 때 가장 만족스러워하지만 의무감 때문에 하는 일 역시 크게 불만스러워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많이 있다. 심리적 엔트로피는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하는 일에서 가장 높이 나타났다.

 

 

 

타성에 젖은 목표를 근절한다는 역설적 목표는 한 사람이 자신의 정신력을 이십사 시간 쏟아붓는다 하더라도 이루기 벅찬 과업이다. 요가 수행자나 승려는 타성에 젖은 목표가 의식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막느라 전력 투구하는 사람들이므로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만한 여력이 거의 없다. 동양 종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서구인이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과는 정반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나는 퇴근 후에 친구와 만나 즐겁게 술을 마시면서도 가족에게 곧바로 가지 않은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한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별로 생소하지가 않다. 하루하루의 삶이 그런 모순으로 차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다른 활동도 이와 같다. 섹스·휴식·TV시청은 정도가 심하지 않을 때는 일상 생활의 질을 끌어올리지만 그 효과가 누적되지는 않는다.

 

 

 

하루의 리듬은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고독으로 들어가기와 고독에서 빠져나오기다.

 

 

 

일은 우리에게 퍽 묘한 경험을 안긴다. 가장 강렬하고 만족스러운 순간을 일에서 경험하고 자부심과 자기 정체성 또한 그것에서 얻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일을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피하려고 드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객관적 작업 환경과 우리의 주관적 태도,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일이 즐겁다는 생각을 좀처럼 갖기 어렵다.

 

 

 

문제는 일을 어떻게 하고 일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어려움에서 어떤 경험을 끌어내는가에 달려 있다.

 

 

 

일은 필요악으로 여겨진 반면 쉴 수 있는 것,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로 받아들여졌다. 여가를 즐기는 데는 특별한 재주가 필요 없고 아무나 즐길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임을 보여준다. 여가는 일보다 즐기기가 더 어렵다.

 

 

 

목표가 없고 교감을 나눌 수 있는 타인이 없을 때 사람들은 차츰 의욕과 집중력을 잃기 시작한다. 마음은 자꾸만 흔들리고, 불안감만 조성하는 해결 불능의 문제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마음이 붕괴되는 이런 최악의 무질서 상태를 피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불안의 샘을 의식에서 지워주는 자극에 의존하게 된다. 그것은 드라마 시청일 수도 있고 연애 소설이나 추리 소설 같은 판에 박힌 이야기를 읽는 것일 수도 있으며 도박이나 섹스에 빠지는 것일 수도 있고 술이나 마약에 탐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들은 의식에서 벌어지는 혼돈을 짧은 시간 안에 줄여주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허무감과 불쾌감이다.

 

 

 

미국의 10대는 TV를 보는 동안에는 13퍼센트가, 취미 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34퍼센트가, 운동이나 게임을 하는 동안에는 44퍼센트가 몰입을 경험하고 있다(1977년 자료). 이것은 TV시청보다 취미 활동이 두 배 반 가까이, 적극적으로 임하는 운동이나 게임이 세 배나 더 강한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데도 이들 10대는 취미 활동이나 운동보다는 TV를 보는데 무려 네 배나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붓고 있다. 어른들도 이 비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절반에도 못 미치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우리는 왜 네 배나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는 것일까?

 

 

 

몰입 경험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은 책을 많이 익고 TV를 적게 보는 사람이며, 몰입 경험을 가장 적게 하는 사람은 책은 거의 안 읽고 TV로 소일하는 사람이었다.

 

 

 

여가는 생산 활동이 너무 구태의연하고 무의미해진 시대에 득세한다. 앞으로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여가에 쏟을 것이고 더 정교하고 인위적인 자극에 의존할 것이다.

 

 

 

현대 문명은 라디오·TV·나이트클럽을 비롯한 기상천외한 오락을 수도 없이 고안하여, 얼핏따분하게 여겨지는 땅과 해, 바람과 별로부터 벗어나 우리가 색다른 자극을 얻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오래 전의 현실로 돌아가려는 것이 바로 항해다.

 

 

 

멍텅구리를 뜻하는 영어 단어 ‘idiot’는 혼자 사는 사람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이다.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사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발상이 스며들어 있다. 현대의 무문자(無文字) 사회에도 이런 의식이 깊숙이 뿌리박혀 있어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개인은 마귀 취급을 당한다.

 

 

 

친구는 일평생을 가도 끊임없이 자극을 줄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 우리의 정서적·지적 기량을 갈고 닦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이런 이상에 도달하기는 쉽지 않다. 성장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지 않는 자아상(自我像)을 담아두기만 하는 고치의 역할을 하는 우정도 있다. 10대의 동년배 집단, 클럽이나 다방에서 잡담으로 소일하는 이들, 직업으로 얽힌 상조회, 술친구들은 이렇다 할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는 위안감을 준다. 이러한 모임의 성격은 <그림 3>에서 알 수 있는데, 혼자 있을 때보다 이런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집중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친구들과 같이 어울릴 때는 대체로 정신적 노력을 기울이는 예가 드물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와의 사귐이 일시적이고 피상적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정서적 위기를 맞이한 성인들이 자주 토로하는 고백의 하나가 바로 참다운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20세기가 이룩한 문화적 성취의 하나가 바로 삶에서 ‘좋은 섹스’의 중요성을 재발견했다는 것이다.

 

 

 

가령 미각의 일차적 기능은 신선한 음식과 부패한 음식을 구별하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맛의 섬세한 차이에 바탕을 둔 복잡한 조리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므로 성적 쾌락은 그 유래가 무엇이었든 간에 삶을 풍요롭게 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언제든지 열어줄 수 있다. 그러나 허기와 관계없는 폭식이 부자연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애정·관심·일체감과 동떨어진 성행위에 집착하는 것은 빗나간 자세다.

 

 

 

우리가 얼마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가를 깨달은 사람 중에는 아예 극단의 길을 치달아 섹스에만 몰입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고독을 견디는 능력이 있다고 과신하는 경향이 강하다.

 

 

 

기업의 총수는 부족의 추장과도 같다. 집무실로 찾아와서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에 프로그래밍 된 것이다. 우리는 봐야 하는 대로 보는 타성, 기억해야 하는 대로 기억하는 타성,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신을 숭배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박쥐나 국기에 대해서 느껴야 하는 대로 느끼는 타성에 젖어 있다. 인생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도 그런 타성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문제는 우리가 머릿속으로 지어낸 가공의 대상을 만족시키기 위해 온 정력을 쏟아붓는다는 점이다.

 

 

 

물론 내 안에는 못되고 치졸하고 비뚤어지고 우유부단한 면이 수없이 도사리고 있지만, 난 거기서 힘을 끌어낸다. 난 그것들을 바꿀 수 있다. 그것들은 힘의 원천이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작가가 휘어잡을 수 있을 때 그것들은 작가의 재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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