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타워-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릴리 프랭키, 랜덤하우스, 2007]
열 살 남짓했을 때, 이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은 나는 엄니에게 말했다.
“나는 의사 집 아들이 더 좋은데.”
그러나 엄니는 항상 그렇듯이,
“그랬으면 너는 태어나지도 않았어야.”
라고 내가 태어난 인과를 알아듣게 일러주는 것이었다.
가구는 아무 것도 없어서 방 네 귀퉁이가 시원하게 다 보였다. 그 아무 것도 없는 방에 엄니는 나를 위해 책장을 사주었다. 좌우로 여닫이문이 달린 커다란 책장이었다. 그리고 손수 방석도 만들어 주었다. 털실로 커버를 짜고 안에 우레탄을 넣은 얇은 방석. 베이지 색 털실 커버 한가운데는 펠트 헝겊을 오려붙인 우주소년 아톰 아플리케. 엄니는 도무지 그림에는 소질이 없는지라 도통 하나도 비슷하지 않은 아톰. 게다가 아톰의 살색은 갈색 펠트여서 상당히 남방(南方) 계통인 우주소년 아톰이었다.
초등학교에 올라가 책가방을 짊어지고 하교하는 길이면 늘 상점가나 역 앞에서 외할머니의 모습을 찾으며 돌아오곤 했다.
겨울에는 몇 겹을 껴입어 뚱뚱해진 외할머니를, 여름에는 남자처럼 하얀 셔츠 한 장에 목에는 수건을 늘어뜨린 외할머니를 찾아내고 슬며시 뒤로 다가갔다.
잠수함 안에서도 담배를 피울 이 사람에게 병원이나 환자 앞에서의 끽연은 당연한 일이었다.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희곡 중에 이런 대사가 있다.
‘온갖 성실한 것 중에서도 결혼이라는 놈이 가장 장난을 많이 친다.’
그 간단한 관계를 맺은 것뿐인, 장난질을 친 남자와 여자가 일이 흘러가는 과정상 부모가 되고, 어쩔 수 없이 ‘가족’이라는 어려운 관계를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저 아무 일 없는 듯,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먼지를 밖으로 쓸어내지는 못해도 방구석에 밀어놓다 보면 흘러가는 시간이 종이를 겹겹이 붙여 만든 연극 소품 같은 ‘가정’ 정도는 만들어 준다.
하지만 가족관계란 몹시 신경질적인 것이다. 무신경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일수록 실은 세심한 신경이 필요하다. 금이 간 거실 벽, 가령 이미 눈에 익어버려서 그것을 웃음거리고 바꿀 수 있다 해도 거기서 확실하게 바람은 들이닥친다. 웃고 있어도 바람은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알지 못할 일이 있다.’
자주 듣는 말이다. 분명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부 당사자만 모르고 있는 둘만의 일’은 어린 아이나 타인의 냉정한 눈에 더 잘 보이는 경우도 있다.
가난은 비교할 것이 있을 때 비로소 눈에 띈다.
‘가난하더라도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부자, 그것도 대단한 부자이다. 하지만 부자라도 언제 가난해질지 모른다고 겁을 내며 사는 사람은 헐벗은 겨울 같은 법이다.’
<오셀로>에 등장하는 이런 대사도 도쿄라는 무대에서 듣게 되면 관념적이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로 다가온다.
‘호주머니 속에 넣어둔 100엔’은 가난하지 않지만 ‘할부로 사들인 루이비통 지갑 속의 전 재산 1000엔’이라면 그건 슬프도록 가난하다.
개발 붐을 탄 패션빌딩에 들어선 어중간한 레스토랑에서 줄을 서면서까지 기어들어가 어중간한 식사와 어중간한 와인을 마신다.
착취하는 측과 착취당하는 측, 무시무시한 승부가 명확히 색깔별로 분류되는 곳에서 자신의 개성이나 판단력이 함몰되고 마는 모습에 빈곤은 떠도는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필요 이하로 비춰지는, 그런 도쿄의 수많은 이들의 모습이 가난하고 서글픈 것이다.
‘가난’이란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결코 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도쿄의 ‘볼품없는 가난’은 추함을 넘어 이미 ‘더러움’에 속한다.
우리 집에는 ‘도둑이 가져가면 가장 곤란할 물건’이라며 엄니가 애지중지해온 ‘쌀겨된장 장아찌 항아리’가 있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 남의 집에 불려갈 때는 공연히 나 때문에 엄니가 욕을 먹겠다 싶어서 젓가락을 제대로 쥐어보려고 애를 써보기도 했지만, 엄니는 그런 체면치레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자신이 창피를 당하는 건 괜찮지만 창피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게 엄니의 예의범절이었다.
어쩌다 내 젓가락 쓰는 법을 보고, 부모님에게 영 잘못 배우셨네 어쩌네 하며 자꾸 지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따뜻한 요리가 나와도 냉큼 먹지 않고 주절주절 떠들고 있거나 아직 먹지 않은 요리에 담뱃재를 떨어뜨리는 ‘상놈’인 경우가 많다.
어린 아이의 하루와 한 해는 농밀하다. 점과 점의 틈새에 다시 무수한 점이 빽빽하게 차있을 만큼 밀도가 높고, 정상적인 시간이 착실한 속도로 착착 진행된다. 어린 아이는 순응성이 뛰어나고 후회를 알지 못하는 생활을 보내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간 일은 냉혹할 만큼 싹둑 잘라내고, 하루하루 다가오는 광채나 변화에 지조라고는 없을 만큼 대담하게 전진하고 변화해 간다.
그들에게는 ‘그냥 어쩌다보니 지나가는 시간’ 같은 건 없다.
어른의 하루와 한 해는 덤덤하다. 단선 선로처럼 앞뒤로 오락가락하다가 떠민 것처럼 휩쓸려간다. 전진인지 후퇴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모양새로 슬로모션을 ‘빨리 감기’ 한 듯한 시간이 달리가 그린 시계처럼 움직인다.
순응성은 떨어지고 뒤를 자꾸 돌아보고 과거를 좀체 끊지 못하고 광채를 추구하는 눈동자는 흐려지고 변화는 좋아하지 않고 멈춰서고 변화의 빛이라고는 없다.
‘그냥 어쩌다보니 지나가는 시간’이 덧없이 흘러간다.
내 인생의 예측 가능한 미래와 과거의 무게. 자신의 인생에서 미래 쪽이 더 중요한 종족과, 이미 지나가버린 일 쪽이 더 묵직하게 덮쳐드는 종족. 그 두 부류의 종족이 가령 같은 환경에서 같은 생각을 품고 있다 해도, 거기에는 명백히 다른 시간이 흐르고 전혀 다른 견해가 생겨난다.
이제 겨우 뛰기 시작했는데 앞으로 가 닿을 곳, 그 끝에 과연 ‘행복’이 있을 것인가 하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능력이 성공을 가져다 준다고 해도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 이미 끝장이다.
인간의 능력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인간의 ‘감정’이란 이미 오랜 옛날부터 그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아이는 세상일을 알면 알수록 생각이 평평해진다. 다른 사람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을 원하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부분은 지독히 싫어하게 된다.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것을 콤플렉스로 느끼게 된다.
그러자 즉시 봄의 따스함이 우울한 온도로 바뀌었다.
달이 뜨네 달이 뜨네
미이케(三池) 탄갱 위에 달이 뜨네
굴뚝이 하도나 높아서
달님도 눈이 매울 거예요
당신이 그럴 작정으로 말한다면
결심을 하지요, 헤어집시다
원래의 열 여덟 아가씨로
되돌려 준다면 헤어집시다
한 산, 두 산, 세 산을 넘어
그 속에 피어난 팔겹 동백꽃
제아무리 곱게 피어났어도
님이 한 번 지나가면 원수의 꽃
기쁘게 모실 그날이 오기까지
마음은 하나 몸은 둘
뿔뿔이 헤어진 섭섭함에
꿈에서나마 그 님과 이야기 하고파
어릴 적, 온 동네 사람이 모여서 춤을 추는 명절이 다가오면 공민관(公民館)에 모두 모여 <탄광 타령> 연습을 하곤 했다.
가혹한 노동 속에서 태어난 노동요.
아부지는 터키탕이니 러브호텔, 종교단체 건물처럼 주변 주민들이 그런 건물이 들어서면 얼굴을 찌푸릴 종류의 건축만 전문으로 하는 것 같았다.
떠나는 날, 무인역 홈에 벚꽃이 눈발처럼 쏟아졌다. 내다보이는 저 끝까지 논밭이 펼쳐지고 그 맞은편으로는 폐광 산이 보였다. 아무 예쁠 것도 없는 그 풍경 속에 덜렁 솜사탕 같은 벚나무가 멍하니 떠있었다.
가재도구와 외할머니의 몸은 점점 낡고 기운을 잃어가는 속에서 하루하루 넘기는 일력(日曆)만 새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하루 중 어떤 때가 즐거운 것일까. 무엇이 인생의 낙일까. 어떤 일에 행복을 느끼고 어떤 일에 슬픈 것일까.
“본드를 하면 뼈가 약해져서 죽은 다음에 화장을 해도 뼈가 하나도 안 남는다더만. 나는 벌써 꽤 오래 했으니 뼈가 무지하게 약해졌을겨. 아직 한 번도 못해봤는데, 고추가 말을 안 들으면 어쩐다냐?”
“그런 걱정 허들 말어. 고추에는 뼈가 없으니께.”
‘인간의 목적은 태어난 본인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메이지 시대의 문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내 속에서 뜨겁게 일렁이는 영혼의 수도꼭지에서 콸콸 쏟아져 나온 목적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가령 그것을 ‘꿈’이라는 말로 바꾸어 입에 올리는 자가 있다 해도, 그 ‘꿈’을 만들어낸 방법은 대략 저기 저 텔레비전이나 잡지 책에 자신의 너절한 욕망을 대충 갖다 붙인 것뿐.
바람에 날려 와 발치에 휘감기는 라이브 공연 광고지에 그저 잠깐 착각을 한 것뿐.
게다가 미술대학이라는 곳은 특수한 가치관 속에서 학생들이 차가운 우월감을 품고 있다. 이곳에 입학한 것만으로 자신이 예술가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어쩔 생각이랴?”
“아르바이트는 하겠지만, 우선은 아직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래? 그렇게 정했으면 됐잖여? 네가 정한 대로 해. 그렇기는 한데, 그림을 그리건 아무 것도 안 하건, 어떤 일에나 최소 5년은 걸리는 거여. 일단 시작하면 5년은 계속해. 아무 것도 안할 거라면 최소 5년은 아무 것도 안 하도록 해봐. 그 사이에 다양하게 생각을 굴려. 그것도 힘든 일이여. 도중에 역시 그때 취직했더라면 좋았다느니 어쩌느니 했다가는 너는 백수건달로서의 재능도 없는 거여.”
막연한 자유만큼 부자유한 것은 없다. 그것을 깨달은 것은 온갖 자유에 꽁꽁 묶여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된 뒤였다.
인간은 올려다보는 일보다 내려다볼 때 훨씬 더 강력한 집중력을 사용한다.
아무 것도 시작한 게 없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두려울 게 없다.
무언가를 손에 넣은 사람에게나 두려움과 따분함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가오는 것이다.
자기 일로 정신없이 돌아가다 보면 뛰건 구르건 그 시간은 정지한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밖에 보이지 않고 자신의 체내 시계만 보고 있으면 세상의 시간은 움직이지 않는 거나 매한가지다.
하지만 문득 발을 멈추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가지게 되면, 문득 많은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 자신이 아니라 대상을 향해 오랜만에 시선이 옮겨갔을 때, 시간이 완전히 정지된 것처럼 보냈던 때에도 분명하게 일력은 넘어가고 또 넘어갔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독은 사람을 기분 좋은 감상(感傷)에 취하게 하고 막연한 불안은 꿈을 말하는 데 꼭 필요한 안주가 된다.
홀로 고독에 시달리며 불안을 달고 살아가는 때는 사실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때이며 오히려 다부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때인 것이다.
없는 돈은 없는 것이다. 애초에 짧은 소매는 아무리 잡아당겨도 긴소매가 되지는 않는다.
도쿄의 밤하늘은 미처 검은색이 되지 못한 회색이고, 네온사인의 삼원색은 붓을 빨아낸 그림물통의 물처럼 이미 어떤 색깔을 섞어도 어떤 빛을 들이대도 도무지 바꿀 수 없는 회색의 농도만 점점 짙어져 간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의사의 진단과 기량에 차이가 나다니, 그것도 좀 문제였다.
즐거운 시간은 방울이 비탈길을 굴러가듯 아름다운 소리를 남기고 재빠르게 지나간다.
영화로나 보던 그런 것들이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옛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일, 깨닫지 못했던 일이 있다.
모든 것은 진화하는 과정에서 작아진다는 것.
위장된 웃음과 거짓된 온화함 속에서 3등을 건지러 가기보다는 어금니를 악물고 1등을 향해 온힘을 다해 주었으면 싶었다.
‘원래 희망이란 있는 것이라고도 없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도 같은 것이다. 땅에는 애초에 길이란 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엄니는 지금도, 어쩌면 며칠 안에 죽어버릴지 모르는 지금도, 아직 무언가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숨을 거둔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모든 일이 남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것에 뭔지 모를 분노를 느끼면서도, 그렇다고 내가 직접 나서서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신기하게도 인도에도 아프리카에도 달에 사는 토끼에 관한 우화가 전해져 온다고 했다.
아프리카의 달과 토끼 이야기.
달을 모시던 토끼는 어느 날, 지상에 말을 전하고 오라는 명을 받았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느니라. 너는 지상에 내려가 인간들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하여라. –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이미 너희에게 죽음이란 없느니라. 죽어도 다시 살아나리라. 영원히 사는 것이니라…. 알겠느냐, 그렇게 전하고 오너라.”
하지만 토끼는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지상에서 돌아온 토끼에게 달이 물었다.
“인간들에게 똑똑히 전하고 왔느냐?”
“예, 인간들은 언젠가 죽을 것이라고 전하고 왔사옵니다.”
그 말을 들은 달은 크게 화를 내며 토끼에게 말했다.
“이런 어리석은 것! 내 말을 똑똑히 듣지 않았구나! 완전히 거꾸로 전하고 오다니!!”
달은 들고 있던 지팡이를 토끼에게 내던졌다. 지팡이는 토끼의 입 끝에 맞았고 토끼는 너무나 아파서 날카로운 발톱으로 달을 할퀴었다.
그때부터 토끼의 입은 갈라지게 되었고 달에는 흑점이 생겼으며 인간은 다시 살아날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
사람의 마음이란 매 초마다 변화한다. 언뜻 말을 흘린 참에 뒤바뀌기도 한다.
네온에 몰려드는 나방처럼 오늘도 도쿄에는 어디선가 사람들이 몰려들어 북적거렸다. 저마다 그 근처 물웅덩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나방처럼 혼자서 태어나고 혼자서 살아가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머니를 울리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몹쓸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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