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그에게 안부 전해줘, 이치카와 다쿠지, 랜덤하우스중앙, 2005
아버지 회사일 때문에 나는 수없이 전학을 했다. 우리 가족은 모노폴리* 토큰처럼 저쪽에 둥지를 틀었다가 이번에는 이쪽으로, 늘 다음 장소를 향해 옮겨 다니는 나날을 보냈다. 아버지의 상사가 내던지는 주사위의 숫자만큼 도시를 넘어 다니고, 그리고 때로는 빙 돌아 다시 처음 살던 곳으로 되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 모노폴리: monopoly. 독점권이라는 뜻의 보드게임으로, 토큰을 사용하여 지도 위의 영역을 독점하고 통행료를 벌어들이며 이동한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내 속에 있는 무언가를 슬쩍 만진 것 같은 감촉이 있었다. 그곳은 명치 바로 윗부분의 대단히 민감한 장소여서, 나는 나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사람이란 뒷걸음질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야. 보이는 건 언제든 자신이 걸어온 여정뿐이지. 왼쪽 길로 가본 다음에야 비로소 오른쪽에도 길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
“있죠. 지금 당신 눈앞에 있는 건 로탈라 마크란드라.”
“무슨 마법의 주문 같네요.”
“수초 이름은 모두 그래요. 루드위지아 그란듀로사, 레드 밀리오피람, 하이그로필라 로자에네르비스……”
내가 가리키는 수초들은 다들 이미 잠이 들어서 잎사귀를 닫고 있었다.
라이카 개가 탔던 위성이 지구를 한 바퀴 빙그르르 돌 만큼의 시간(다시 말해 거의 100분!) 동안 교수는 그녀에게 동남아시아의 감자과 식물에 대한 강의를 계속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은 모두 ‘어머니…’라고 중얼거린다던데, 그게 남자의 진실 아닐까요?”
“그래요. 필요한 건 거리와 시간이지요. <오랜 부재는 사랑을 멸한다>라고 미라보도 말했습니다.”
“즉, 눈물은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그곳에 이르는 내적인 프로세스는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아.”
“네”
“그 눈물을 바로 원고지 칸을 채우는 언어라고 생각하면 돼.”
“어떤 한계점을 넘어서면 언어는 자율적으로 채워진단다.”
어째서 자식이란 이렇게도 부모 앞에서 솔직해지지 못하는 것일까.
“그래, SOS야. <save our soul>이라는 뜻의.”
“SOS라는 게 그런 의미였어?”
“글쎄, 그냥 갖다 붙인 거라는 얘기도 있고.”
“고립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남하고 똑같이 하겠다든가,그런 기색이 없었죠. 오로지 자기만을 믿으며 조금도 흔들리는 부분이 없었어.”
병원으로 향하는 전차 안에서 카린과 나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이미 마음은 침대에 드러누운 유지 곁에 가 있고, 나는 그런 나 자신을 뒤미처 쫓아가는 용기(容器)d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지의 유무지지 못한 면은 내가 보기에도 분명 치명적인 급소였다. 그는 가슴에 과녁판을 붙이고 돌아다니는 오리나 마찬가지였다.
행복이 너무 적기 때문이야, 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고집을 피워봤다. 행복이 너무 적기 때문에 서로 다투게 되는 것이다. 신께서 조금 더 넉넉하게 행복을 내려주신다면, 카린이 그런 서글픈 말을 내비칠 일도 없으련만. 남아도는 행복, 다 쓸 수 없을 만큼 많은 행복.
“나는 영원히 살아보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긴 침묵 끝에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내 마음은 분명 영원이라든가 무한이라든가, 그런 것을 견뎌낼 수 있게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대로 보내버린 전차 세 대 분의 사랑.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보내주는 시그널을 놓치는 일은 없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상당히 원시적인 감각이야. 가슴이 달아오르면서 땀구멍에서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분출되는 거야.”
“에? 그게 뭐야?”
“사랑의 유기분자. 나노 사이즈의 러브레터야.”
“영원의 사랑을 맹세한다는 건 너무 경박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라고 그녀가 말한다.
“왜”라고 화면을 향해 나는 묻는다.
“영원이라고 해봐야 기껏 50년 안팎이잖아.”
“응, 그건 그렇다.”
“어지간히 값싼 영원이지 뭐야.”
“그럴까?”
“인간이 최소한 천 년쯤 살게 되었을 때나 그런 말을 입에 담았으면 좋겠어.”
“그럼 우리는 어떤 말로 사랑을 맹세해야 해?”
“말 같은 거 필요 없어”라고 카린은 말한다.
“50년분의 키스를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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